죽음 감수하며 한국 위해 몸 바친 ‘언더우드’ 선교사
상태바
죽음 감수하며 한국 위해 몸 바친 ‘언더우드’ 선교사
  • 김성해 기자
  • 승인 2016.10.20 1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을 근대화로 이끌었던 선구자 서거 100주년

         복음의 불모지였던 조선 향해 선교의 비전 품은 청년 선교사

       조선셩교서회 설립·찬송가 재정비·학교 설립 등 다양한 사역 펼쳐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 선교사이다. 그는 조선을 근대사회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름 앞에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는 곧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표현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시대가 근대사회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뿌린 씨앗 중 하나인 연세대학교는 지난 12일, 그의 서거 100주년을 기리며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 및 제16회 언더우드 선교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서울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추모 기념강연을 맡은 윤경로 교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는 ‘언더우드,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라는 발제를 통해 그가 남긴 발자취를 평가했다. 

오지의 땅 조선으로 떠난 선교사
윤경로 교수는 언더우드의 회고록 중 일부를 이 자리에서 밝혔다. 언더우드는 “조선으로 선교를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조선은 어떻게 될까? 나는 조선에 가기로 다시 한 번 결심한 후 센터스트리트 23번지(옛 장로회 선교본부 건물)로 방향을 돌렸다”고 간증했다. 

14살 어린 시절부터 ‘인도 선교사’를 꿈꾸며, 사역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해왔던 언더우드는 1883년 뉴브런즈위크 신학교 내 모임에서 오지의 땅 조선에 대해 듣게 된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조선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조선으로 입국하기 전 경유지인 일본에 머무는 동안 조선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함께 머물던 미국성서공회 소속 선교사에게 조선의 상황에 대해 들었으며, 성경을 한글로 번역중인 이수정을 만나 한글도 공부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 항에 입항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여성 선교사는 입국이 허가되지 않았다. 결국 언더우드 선교사만 한성(지금의 서울)으로 입경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입국 후 알렌 선교사의 제중원에서 의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의료 봉사를 하는 틈틈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윤경로 교수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해 초기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병원과 근대식 학교, 교회를 세웠다”며 “병원과 학교 교회는 봉건적인 한국사회를 근대사회로 변화 및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의료선교사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후 학교를 세워 교육선교사로 활동했고,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복음선교사의 역할을 수행해 낸, 근대사회로 변화하는데 단초의 역할을 했다”며 “언더우드 선교사로 인해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이후 ‘병원 옆에 학교가, 학교 옆에 교회가 생겨났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라고 극찬했다.


자신의 목숨보다 열정을 쏟은 사역들
윤 교수는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사역한 일들 중에는 ‘첫 번째’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례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그는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고, 오선지 악보를 이용한 첫 찬양가를 간행했으며 성서번역위원회와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서적 출판사인 ‘조선셩교서회’도 설립했다.

‘조선셩교서회’는 현재 (재)대한기독교서회의 모체인 초교파적 연합기관으로, 기독교 관련 서적과 전도지 등을 출판한 곳이다. 1900년도 간행한 출판물 중 판매된 서적의 권수는 약 9만부를 넘었으며, 1905년에는 25만부를 돌파하기도 했다.

1897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순 한글판인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했다. 당시 전도가 목적이긴 했지만, 신문에는 여러 서구문물을 다루는 정보 및 지식이 담겨있었다. 선진 농사법, 근대적 기계를 다루는 방법, 위생 문제 등 선진 근대 정보를 전했던 ‘그리스도신문’은 조선시대를 근대화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그의 사역들 중에서는 학교 설립도 빼놓을 수 없다. 입국 후 1년만인 1886년 한국 최초의 고아학교인 경신학당을 개설한 언더우드는 이를 언더우드학당으로 발전시켰으며 학당에서 김규식과 안창호 등의 인물들을 길러냈다. 언더우드는 경신학당에 만족하지 않고 경신학당 대학부를 설립했다. 1915년 설립된 경신학당 대학부는 경성 YMCA 방 한 칸에서 출발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경신학당 대학부, 즉 연희전문대학을 세우기 위해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받은 52,000달러와 조선으로 귀국 후 후원받은 25,000달러로 그는 1916년, 연희동에 있는 땅 30만 평을 매입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건강의 위협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땅의 학교 설립을 위해 도일했다. 당시 ‘대학 강의를 하려면 일본어를 해야 한다’는 총독부의 교육법령개정에 따라 일본어를 배우는데 크게 힘썼다. 언더우드의 열정은 높았지만, 그의 건강이 열정을 따라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조선 선교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그의 고국인 미국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서거 후인 다음해 4월 7일에야 학교 설립 정식 인가가 났고, 건축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 학교가 바로 지금 서울 신촌에 위치한 연세대학교다. 


죽어서도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와 그의 가족
윤 교수는 이 자리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언장을 소개했다. 언더우드의 유언장은 지난 4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월례학술발표에서 연세대학교 박형우 교수가 발굴 소개했다. 유언장에는 그가 서거하기 10년 전 작성됐으며,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소유재산 분할이 주된 내용이다.

윤경로 교수는 “그의 나이가 40대 후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장을 작성한 이유는 그가 건강을 잃으면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그의 유언장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의 재산을 상속하게 되는 대상자 중에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언장에 거론된 한국인은 그의 비서이자 고아학교 출신이었던 김규식과 한국생활을 도와준 한국인 집사 및 가정부 등이다. 특히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부인과 아들보다 앞선 첫 번째 대상자로 지정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그에게 500불과 ‘소래비치 회사(Sorai Beach Co.)’의 주식 5주를 배당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사랑은 그의 자손으로 이어졌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서거하기 직전까지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원했다. 언더우드의 가족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유해를 한국으로 안장할 비용 3,000원을 마련했다. 

그 시대의 3,000원은 거액이었다. 하지만 곧 그의 가족들은 3,000원을 영신학교에 기부했다. 그들은 당장 언더우드의 유해를 한국으로 옮기는 것보다, 언더우드의 교육정신이 깃든 학교에 기부하는 행동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언더우드의 유해는 1999년,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언더우드 가족묘지’로 안치됐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을 기리며
연세대학교는 언더우드의 서거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는 시상식과 함께 언더우드 기념 전시회도 개막했다. ‘제16회 언더우드선교상 시상식’ 에서는 카메룬에서 28년 이상 봉사한 윤원로 선교사와 말레이시아에서 16년 동안 사역한 조영춘 선교사가 수상자로 뽑혔다. 

‘언더우드선교상’은 한국선교의 초석을 다졌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지난 2001년 제정한 상이다. 해외 오지에서 15년 이상 헌신적으로 사역한 선교사들에게 상패와 상금 3,000만원을 전달한다. 

언더우드기념사업회는 이 외에도 해외에서 5년 이상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개인 및 단체를 선발해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선교비 지원 대상자는 우간다에서 선교중인 이호영 선교사가 선정됐다. 

이날 연세대학교는 백주념기념관 내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전시회 개막식도 진행했다. 기념전시실에는 고종황제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하사했다는 사인참사검을 비롯해 언더우드 타자기 , 언더우드 선교사 초상화 등이 전시됐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10월 25일까지 계속된다. 

이어 백주년기념관 앞 정원에서 ‘언더우드 둥근잎느티나무 기념식수’도 거행했다. 김정수 장로(한양대학교 명예교수)가 기증한 묘목은 과거 언더우드 선교사가 1908년 한국으로 들어올 때 성경책과 함께 가져온 둥근잎느티나무 두 그루 가운데 하나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입구에 한 그루를, 나머지 한 그루는 양평동교회 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 중 새문안교회에 심겨진 느티나무의 씨앗을 김정수 장로가 묘목으로 길러냈고, 연세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언더우드와 그의 외아들인 원한경 박사(Horace Horton Underwood)의 설교,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과 정신을 담아낸 책도 출간됐다.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홍승표, 홍이표, 이혜원은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을 맞아 ‘언더우드의 마지막 메시지’를 써냈다. 이 세 저자는 그동안 언더우드를 연구하면서 이 둘의 자료를 정리하고 번역하는 일에 힘써왔다. 

연세대학교의 김용학 총장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했으며,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사역을 펼쳤고, 선교를 위해 성경 번역 사업과 찬송가 정비, 교회 설립 등을 진행했다”며 “연세대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뜻을 따라 기독교 대학의 참된 면모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