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30]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도들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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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30]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도들의 말인가?
  • 정장복 교수
  • 승인 2016.10.13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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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어떤 경우도 본문을 각주로 사용할 수 없다
▲ 정장복 교수(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앞의 강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로 변환되어 표현되는 문제는 우리의 언어구조에 기인함을 지적한 바 있다. 우리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도록 오늘의 설교자들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와 맥락을 같이하는 문제가 또 있다. 그것은 설교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갈등이다. 그 갈등 또한 설교자의 의식 변화와 함께 사려 깊은 표현을 필요로 한다.

1. 성경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나 회중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다. 복음 중심의 교회에서 66권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의심하거나 부정한 사람은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고 그 말씀에서 메시지를 받아 설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직접 선지자들에게 하신 말

씀을 비롯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성령님이 역사하신 현장을 말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말과 사건을 본문으로 정했을 때에 문제가 발생한다. 즉, 말이나 사건의 주체가 선지자나 사도들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1.4:11)라고 가르치십니다.] 냉정히 따지면 그 말은 바울이나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재확인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바울과 요한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시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믿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이는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가르치십니다.(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아…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가르치십니다.)]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럴 때 같은 말씀이지만 말씀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고 그 말씀의 위상이 달라진다.

그렇지 않는 경우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말씀의 주체가 되어 등장하게 된다. 성경에 실린 각종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전개된 사건을 통해서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임을 말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상적인 사고의 틀이다.

2. 설교자가 본문을 각주로 사용하지 말라.

설교학 교수로서 설교를 들으면서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다. 그것은 본문을 읽고 본문과는 무관한 말만 계속하다가 설교의 끝 무렵에 본문에 대한 언급을 3~4분하고 끝날 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펼치고 본문을 각주로 사용할 때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두 번째의 경우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본문의 각주화’ 현상을 한국어를 사용하는 설교 현장에서는 다들 예사롭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가다듬고 보면 설교자의 ‘무엄한 행위’로 지적받아야 할 큰 문제이다. 이 잘못된 표현은 간단한 토씨 사용, 즉 ‘...도’ 와 ‘...에 보면’에서 발생한다. 이 표현들은 자신의 주장을 언급한 후에 그 말이 맞음을 성경말씀으로 입증하는 사례이다.

‘도’의 예를 들어본다. [사랑합시다. 사랑하기 힘든 대상도 사랑합시다.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우는 자기 말의 정당함을 위해 예수님이 보충해주고 있는 양상이다.

‘보면’의 예를 들어본다. [기뻐합시다. 주님과 함께사는 사람은 슬픔보다는 기쁨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긍정적인 사고가 이어지며 밝은 미래가 다가옵니다. 빌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도 자신의 주장을 사도 바울의 말로 합리화 시키고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불경죄를 범하는 원인은 간단하다. 설교자가 본문 말씀을 앞세우며 그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설교자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생각과 판단, 분석과 경험을 설교의 주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주란 흔히들 글을 쓸 때 자신의 이론을 펼쳐놓고 그 분야의 전공자들에 의하여 남겨진 문헌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보이거나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어떤 경우도 본문을 각주로 사용할 수 없다. 바로잡는 길은 간단하다. 본문 말씀을 먼저 경청하게 하고 후에 설교자의 해석 또는 적용이 자신의 지식과 더불어 이어지게 하면 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무엄한 불경죄’를 짖지 않을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려주고 설교자의 해석과 적용은 뒤로하면 된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합시다. 사랑하기 힘든 대상도 사랑합시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환경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긍정적인 사고가 이어지며 밝은 미래가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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