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론은 학교가, 실무교육은 총회가 맡아 조화이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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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론은 학교가, 실무교육은 총회가 맡아 조화이뤄야
  • 박종화 목사
  • 승인 2016.09.2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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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육이 변해야 한국교회가 산다-목회자에게 듣는 신학교육 해법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은 모든 세계 교회가 부러워한다. 경제성장과 그 궤도를 같이한다. 이것 역시 압축된 성장이다. 성장이 있었지만 신앙 양육이 동반되지 못했다. 

지금은 성장이 아니라 신앙의 성숙을 맛보려 하나, 성장의 과실이 너무도 부실하고 천박하다. 그래서 급격한 성장이 아직은 완만하나 지속적인 교인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적 자유의 물결과 함께 교회는 타당성도 의미도 없는 자기 분화와 분열의 길로 치달았다.

그래서 세계교회 가운데 “최악의 분열된”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이기주의적 방만의 극치를 이룬 셈이다. 개 교회는 많으나 공교회가 없다고 한탄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가 떨어져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기 시작했다는 자조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의 교인감소나 이탈을 막거나 이들을 다시 불러들일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서글플 뿐이다. 사실은 처음 교회로 밀려올 때 그것은 사회 형편상 영적 위로와 피난처로 생각되는 교회로 사람들을 밀어붙인 결과(이를 사회학자들은 push factor라 한다)이지, 교회가 준비하고 매력을 담아 이들을 흡인한 결과(pull factor)가 아니었음을 먼저 솔직히 고백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제는 솔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지금의 교인 감소현상은 기존의 신자들이 교회를 스스로 등지는 현상인가 아니면 교회가 이들을 다시 사회로 밀어내고 있는 현실인가. 어느 경우든 교회는 그동안 성장주의의 허상에 취해 스스로 교만했고, 신앙양육의 책임을 방기했고, 무엇보다 신앙공동체로서의 매력을 상실했다.

이제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워져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들이고 양육하여 세계로 내보내는 본래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개혁을 요구하는 분야가 바로 신학교육의 과제이고 그와 결부된 양질의 목회자 양성 과제일 것이다. 사실 수평이동 신자들이나 교회를 떠나는 자들의 변을 들어보면 담임목사의 인격과 자질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할 사항이다.

여기서 먼저 전제해야할 것이 있다. 성공한 전례에서 배우자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적 양적성장 일변도 상황이 철퇴를 맞은 것은 1997년 전후의 IMF 외환위기가 그 절정이고 뼈아프고 힘겨운 혁신 끝에 그래도 오늘과 같은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구가하고 있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당시 한국경제는 IMF라는 외부의 구세주 겸 지배자가 있었으나, 한국교회는 이제 스스로 나서야 한다. 규제하며 도와줄 주인도 없고 타율로 개혁당할 종도 아니다. 그만큼 개혁의 자유가 있고 동시에 책임이 있다.
 
1970~1980년대 한국교회의 급성장 과정에서 인적자원 계발을 이유로 정규신학대학들은 정원을 대폭 증원했고 이네 맞추어 경영전략을 수립했으며, 정부인가 없는 무인가 신학교가 우후죽순으로 난립하여 부실교육을 부채질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정부공인을 받은 정규 신학대학교/대학원대학교가 약 60여 곳이고, 무인가 신학교가 350여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인된 신학대학교/대학원에서 한해 졸업하는 예비목사들이 약 2,000명 정도이고, 무인가 신학교들의 예비목사들이 5,000여명에 이른다는 통계이다.

각 교단 마다 정확한 통계를 잡을 수 없어 고민이기도 하지만, 설령 교인 숫자는 물론 교역자 숫자도 통계가 부실하여 그대로 참고로 삼기가 어렵다.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지만 손에 들어온 통계를 대체로 살피니 예비목사들 가운데서 소위 임시라도 취업에 성공한 경우가 교단별로 10%에서 60%까지 그 편차가 크다.

그것도 성공률이 아주 낮은 교회개척도 이에 포함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결국 인가받은 신학대학이든 무인가 신학교든 목사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실업자 양산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목사직의 가치하락 그를 통한 “목사양산과 한국교회 몰락”이라는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재 전반적인 교회위기의 한 복판에서 고투하고 있는 현역 목회자들의 실상은 실업자가 아니라서 훨씬 나은 형편인가. 한동안 종교인 세금 문제로 갑론을박을 교회 내에서도 심각하게 벌린 바 있지만, 그 속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너무도 열악하다.

조세는 고사하고 정부가 설정한 최저생계비 이하의 면세점 이하 소득자가 한국교회 전체 목회자의 67%가 넘는다는 현실이다. 오히려 사회보장 혜택을 받아야 할 형편이다. 

여기에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자녀교육비에다가 은퇴 후의 부양비나 주거 문제를 포함한다면 목회자의 건강한 “목회자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실 기초 생계비 조달에 매달리면 목회를 직업으로 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목회자의 사명이 단순한 목회 기능직이 아닌 영성과 인성을 합하여 하늘나라 사람 만드는 직업을 넘어선 “소명”으로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이 일의 해법 찾기는 개별 목회자 단독의 과제가 아니다.

평소 신학교단과 목회강단을 번갈아 경험해본 입장에서 목회자를 위한 신학교육과 현실적 수급계획이 근본적인 개선 내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신이다. 교회는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신학은 교회라는 어장의 물고기이다. 신학이 세상을 상대로 하나님의 뜻을 말해야 하지만 교회라는 선 자리를 통해서이다. 마치 경제학이 인간의 전 경제생활을 관여하지만 시장과 기업이라는 광장을 통해 일하듯이 말이다. 현재 한국 신학교육의 현주소는 교회의 현장과 거리가 있거나 유리된 경우가 많다는 느낌이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교회가 교권이나 금력으로 재단하거나 관리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신학의 자유를 침해하고 신학을 무식한 학문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지성의 축복을 깔아뭉개고 만다. 

신학의 상아탑도 선진 한국교회를 위해 꼭 필요하니 질적으로 우수한 신학자/도를 양성하는데 크게 투자하자. 하지만 목회자 양성은 철저히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전문가로 양성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church-friendly, church-lovely로 표현하고 싶다.

미안하지만 예비목회자들이 막상 교회현장에 와서 보이는 부족한 신학 기초, 현장이해의 태부족, 순박한 목회자적 권위의식, 교회실무에 대한 감각결여가 보이지만, 그래도 소명감이 불타거나 헌신의 자세가 보이면 눈물겹게 고맙고 이끌어주고 싶다. 마치 한국 기업들이 학사 졸업자들을 받아 전혀 새로운 입사훈련과 교육을 거쳐 사원으로 써야하는 경우와 흡사하다. 

결국 신학교는 대학원까지를 포함하여 신학과목 전반에 관한 철저한 기초교육, 목회지향의 신학적 기초를 견실히 쌓아주면 좋겠다. 실제로 목회준비 교육과 훈련은 해당 총회가 맡아 응용과 실무에 전문적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신학교와 총회의 역할분담이 절실하다. 이론교육(신학교)과 실무교육(총회)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목회자는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타학문과 교류하며, 신학이 아닌 다른 전문분야의 교인들과 소통한다. 타학문을 넓게 편력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전문분야의 교인들의 머리와 가슴에 그네들에게 친숙한 언어와 표현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달하는 소통의 깊이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신학의 기반이 튼튼해야하고 개방성을 지녀야 한다. 예컨대 경영의 기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영자의 마음속에 “예수라면 무어라 말씀하실까”를 신학적으로 소통시켜야 한다.  이런 신학훈련을 신학교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 타 학문과 소통할 줄 아는 신학, 유행적 사조의 신학보다 고전적 기초가 든든한 신학, 변화하는 시대와 대화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신학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토론토에서 교환교수로 봉직하면서 터득한 비법을 조금이라도 실험해 보았으면 한다. 대학 캠퍼스 안에 7개의 신학교가 하나의 공동학위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는 등록한 자기 대학의 과정을 이수해야 하지만 신학강의는 공동으로 개설하고 공동학점을 인정한다.

학교마다 전공 교수를 전부 고용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특성의 교수진이면 족하다. 격조 높은 강의에 학생도 좋고, 인건비 절약으로 학교경영에도 이득이고, 연합정신의 함양으로 교회도 이득이었다. 신학교들이 병합하거나 흡수통합의 길로 들어서면 좋겠으나 그러하지 못할 경우에도 차선의 방법이 있다.

요즈음 세계는 기술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가 융합 내지 복합의 시대로 간다. 신학교육과 목회현장의 복합은 물론이고, 신학교육의 현장과 인적자원의 융합 내지 복합적 시도야 말로 윈-윈 할 수 있는 신학교 구조조정의 핵심이라 본다.

오늘의 상황에서 보면 인터넷 연결의 기술을 최대한 이용하여 물리적인 교육의 장이 거리상 떨어져 있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한국 땅에 주어진 선물이다. 신학교 마다 겪을 경영상의 위기와 질적 후퇴를 막고 질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길을 속히 모색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간난고초의 기나긴 여정을 살아왔다. 이제 종교개혁 500주년을 함께 송축하려한다. 이미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로서의 기쁨이다. 이 기쁨이 계속되려면 지금은 개혁된 교회가 다시 개혁을 시도하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로 거듭나는 도리 밖에 없다. 신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신학과 교회가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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