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스의 한글번역성경, 기독교 초석을 다졌다”
상태바
“존 로스의 한글번역성경, 기독교 초석을 다졌다”
  • 김성해 기자
  • 승인 2016.09.28 13: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글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한글은 성경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데 큰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다. 한국의 첫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로 인해 한문 성경이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한문은 극소수의 지식이 높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다. 따라서 기독교가 쉽게 전파되기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한글은 민중의 언어라 습득하기가 쉬웠고 한문보다 번역이 용이했다. 이러한 이유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한국 내 복음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도록 한글을 선택했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로 된 성경책이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곁으로 오게 됐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 (사진제공:대한성서공회)

성경번역의 시초, 존 로스의 고려문 여행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였다.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개시했고, 1871년부터는 산동반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는 1872년 차례대로 중국선교사로 파송됐다.

이듬해인 1873년 로스는 윌리암슨 선교사로부터 토마스 목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두 선배의 한국선교 열의에 감동받은 로스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1874년 10월 9일, 로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시 청국과 조선국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고려문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한국 상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 상인들은 로스가 전하는 복음보다는 그가 입은 옷의 옷감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 실망하는 로스에게 50대의 한국 남자 상인이 찾아왔다. 로스 선교사는 그 상인에게 한국정세 및 한국인 발음법 등을 배웠고, 헤어지기 전 그에게 한문 신약성경을 건네줬다. 


로스는 고려문의 이용가치를 확인한 뒤, 한글성경 번역 계획을 세웠다. 1876년 3월, 강화도조약으로 한국 문호개방 소식을 들은 로스는 다시 고려문을 찾았고,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났다. 그는 이응찬을 따라 봉천으로 들어와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1877년 로스는 ‘Corean Primer’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훗날 한국선교사들을 위한 교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로스는 이응찬과 한두 명의 한국인과 함께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지만, 이응찬이 의주로 돌아가는 바람에 번역은 잠시 중단됐다. 

그러나 로스는 매킨타이어의 소개로 서상륜을 만났고, 그와 함께 요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번역을 이어가게 됐다. 

한글성경 번역이 반포에 이르기까지
한글성경의 번역 과정은 준비기간을 거쳐 1877년부터 1886년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은 번역자, 번역저본, 번역내용 등을 고려하면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번역 단계는 △로스가 이응찬을 만난 1874년 가을부터 ‘Corean Primer’가 출판되는 1877년 여름까지 △1877년 여름 요한복음 번역이 이응찬으로 인해 착수된 때부터 1879년 4월 로스가 영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 까지를 뜻하는 초역기 △ 1879년 5월부터 1881년 5월까지 2년에 걸친 로스의 휴가 기간 중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주도로 번역이 진척 혹은 수정되는 시기 △로스가 귀국한 1881년 6월부터 1886년 가을 ‘예수셩교젼셔’가 완역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 성경번역 사업 과정. 성경번역은 번역자, 번역저본, 번역내용 등을 고려하면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안식년을 마친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조한 35,563개의 음절별 한글 연활자를 받았다. 인쇄기도 상해에서 구입했으며, 2명의 중국인 인쇄공과 서간도 출신의 매약상 김청송을 식자공으로 채용했다.  

1881년 9월, 로스는 성경을 인쇄하기 전 소책자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시험 인쇄하기로 했다.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인 두 권의 소책자는 각각 수천 권이 인쇄됐고,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반포됐다. 

시험 인쇄에 성공한 로스는 8~9차의 수정을 거친 누가복음을 1881년 말부터 인쇄를 시작했다. 마침내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라는 한국 기독교 최초의 성서를 발간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초석을 닦았다. 비록 한지로 된 51페이지의 작은 책이었지만, 조선시대 복음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누가복음에 이어 5월 12일, 요한복음 3,000부가 출간되며, 1884년에는 ‘예수셩교셩셔 맛ㄷㆎ복음’과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 등 4복음서와 사동행전이 간행된다. 이후 1885년부터는 ‘로마셔’, ‘코린돗젼후셔’, ‘가라댜셔’, ‘이비소셔’ 등의 단권들과 요한복음·마태복음 등의 개정판이 계속 인쇄·출판됐다. 
 

▲ 최초의 한글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사진제공:대한성서공회)

신약성경의 단권들이 간행, 보완된 예수성교본은 남은 서신서들을 추가해 ‘예수강셰일천팔빅팔십칠년’에 한글 최초의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로 묶어져 발행됐다. ‘예수셩교젼서’는 339페이지의 책자로, 발행부수는 5,000부였다. 

이처럼 한글성경은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만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됐다. 그리고 이응찬, 서상륜 등 여러 한국인들이 동역자가 돼줬다.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인 학자가 1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비록 존 로스 선교사가 계획하고 추진하며 감독했지만, 실제 번역은 한국인 개종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인 번역자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온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스스로 그 진리를 찾기 위해, 혹은 세례를 받고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신앙의 인물들이었다. 


이후 한국인 개종자들과 성경 반포에 책임을 맡은 권서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마을마다 방문해  성경을 나눠주며 복음의 씨를 뿌렸다. 로스는 성경을 반포하기 수월한 한인촌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했고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사’ 겸 권서로 삼아 파송했다. 이들의 권서 활동으로 개종을 희망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조선 땅에는 서간도 한인촌, 서울, 압록강 연안의 평북 지역, 평양,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복음의 열매들이 맺히고 있었고, 내한한 선교사들이 선교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그들을 찾아와 세례를 요청하는 자들도 생기는 등 로스의 한글 성경은 한반도 내 기독교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총신대학교 박용규 교수는 “’예수셩교젼서’를 보면 첫 장부터 끝 장까지 한글로 기록됐다. 이처럼 한글로 된 성경이라는 부분은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첫째, 존 로스와 이응찬, 서상륜 등의 사람들이 참여해서 만든 ‘최초 한글 성경’이라는 것, 두 번째는 성경번역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성경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해외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전 이미 성경번역이 진행됨에 따라 그들이 수월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부분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박용규 교수는 “결국 존 로스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행위는 결국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다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