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26]설교의 결론, 그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상태바
[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26]설교의 결론, 그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 정장복 교수
  • 승인 2016.09.22 1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교 전체는 마지막 ‘결론’을 위해 존재한다
▲ 정장복 교수(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그 날의 설교 핵심이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들려 줄 수 있는 2~3분의 시간은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그 때문에 결론을 설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종의 순간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결론의 중요성을 아는 설교자는 메시지의 결론을 마음에 미리 정하고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

무엇이 이 설교의 결론이라는 무엇인가에 해한 명확한 설정이 있을 때 설교의 석의와 주해와 적용이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설교 전체는 마지막 결론을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결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데이비스(Ozara Davis)는 그의 명저 『설교의 원칙』에서 설교자의 관심과 준비의 부족으로 인해 설교의 결론이 충분하지 못하게 맺어진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죄”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제 ‘설교자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기본요건을 먼저 열거한다. 첫째, 설교의 종착역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종착역을 모르고 진행하는 열차는 선로를 이탈하여 사고를 낸다. 설교자가 범하는 가장 많은 실수는 설교가 끝나야 할 지점에서 끝을 맺지 못하고 계속 이어가는 데서 발생한다. 회중은 설교자보다 더 정확히 설교가 끝내야 할 지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설교자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설교를 지루하게 끌고 가면 완전한 실패작이 된다.

둘째, 결론은 자연스럽게 맺어지도록 하라. 가끔 서론이나 본론과는 연관성이 없는 결론을 보게 된다. 혹자는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와 같은 불필요한 언급을 한다. 효과적인 결론은 지금까지 전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논리적인 연결이어야 한다. 오늘의 메시지가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회중들이 마지막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이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셋째, 감격스러운 만남이 성취도록 하라. 설교의 최종적인 목적은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과의 감격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 있다. 서론과 본론은 일반적으로 지성의 기능을 통하여 진행된다. 결론은 지성의 기능에 감성의 기능이 함께하도록 함이 효과적이다. 언제나 말씀의 주인과의 만남(encounter)이 이루어질 때 새로운 충동과 감격이 일게 된다.

넷째, 결론은 설교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지점이다. 어떤 설교자는 흥미진진한 예화에 설교의 하이라이트를 두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설교의 원칙은 결론에서 회중의 감성과 지성이 결단으로 모아지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그 결단은 설교자의 정성과 열정이 정점에 도달한 결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간결하고 깔끔한 마무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라. 어느 설교자는 참으로 훌륭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론에서 장황한 서술을 반복을 이어감으로 지금까지 계속되던 그 훌륭한 설교가 심각한 상처를 받았다. 결론은 어떤 경우에도 간결성과 감격이 스며있는 엄선된 문장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이상의 요건들을 마음에 두고 효율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본다. 첫째, 설교의 요점을 정리하는 형태가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은 본론에서 열거한 설교의 주안점들을 다시 요약하여 설교의 결론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설교를 받아쓰는 회중들에게는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가지의 형태만으로 결론을 맺어야 한다면 그것은 설교의 신선미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 충격적이고 경이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오늘날의 회중은 신앙의 양태가 무디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회중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 충격요법의 형태이다. 미국의 제일차 대각성부흥운동의 기수였던 에드워드 목사가 “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지옥을 묘사하며 끝냈을 때, 충격을 받은 회중들이 참회하며 일어선 기록은 대표적인 실례이다.

셋째, 날카로운 비판보다 격려의 형태를 취한다. 설교자는 ‘진리의 선포’라는 이름 아래 자칫 엄격한 심판주의 자세를 취하기가 쉽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인격을 존중해주고 위로와 격려의 설교에 호감을 갖는다. 이러한 시대적인 환경을 고려하면서, 회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품고 편안히 안기도록 해주는 결론의 형태이다.

넷째, 복 주시는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는 형태이다. 우리의 한국에 뿌리내린 종교는 거의 모두가 기복종교의 틀 안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메시지의 결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복종교가 아닌 구원의 종교이기에 이 형태의 결론을 남발하는 것은 주의를 요하고 있다.

다섯째,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 형태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명령하고 가르치시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지금 충성하는 종을 찾고 계십니다.”를 “여러분이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로 하는 경우 주어가 하나님인지 설교자인지를 주시해야한다.

끝으로, 성경말씀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 형태는 냉정히 말하면 결론의 형태라기보다는 앞의 모든 결론 형태에 마지막으로 그날의 본문이나 기타의 성경말씀을 읽어주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또는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고서 성경말씀을 정중하게 읽고 “주님(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로 설교를 끝낸다. 이 형태는 인간의 말로 설교를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경청하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모든 설교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형태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