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의 문화칼럼]사드와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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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문화칼럼]사드와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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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3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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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여름, 여느 때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뜨거운데 더 뜨겁게 만드는 사건이 있으니 이름하여 사드. 대한민국 방위 차원에서 수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뜨거움의 열기가 더욱 높아졌다. 국익 차원에서, 안보 차원에서 차근차근 대민설명회나 토론회를 갖고 결정했다면 아마 삭발이나 저항투쟁 같은 일이 격화되지는 않았으리라.

정부의 고민 역시 이해된다.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한 미사일 방위기지를 세운다는 데에 누가 반색하고 찬성표를 던지겠는가. 장애시설, 교정시설, 소각시설 등을 세운다고 발표하면 거리에 금방 반대 플래카드가 걸리며 목소리 높이는 님비현상이 횡행하는 현실 속에서...

다른 면에서 보자면 정부는 민주화 의식을 고도로 함양시키고 있다. 유럽 선진국에서 펼쳐지는 시민 역사정치의식 교육을 능가하는 시민의식화를 단 시간에 시행하는 정도다. 성주와 인접 도시들의 시민의식이 갑자기 함양된 것은 님비의식을 넘어선 의식화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사드 논쟁은 한 지역, 나아가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시민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사드와 연관하여 할 얘기는 많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과연 어떠한 문제인가? 사드를 통해 우리는 평화를 다시 생각한다. 평화는 무엇인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인가? 그런 평화는 소극적이다. 본질적인 의미의 평화는 미래의 소망과 현실의 행동이 만나는 적극적인 상태이다. 평화는 평화를 향한 의지와 실행이 샘솟는 과정 속에 들어있다. 평화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평화는 진행형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평화를 얻기 위해 여러 방법을 구했다. 강대국과 화친 조약을 맺기도 하고, 결혼 등으로 결맹국이 되기도 하고, 창과 칼을 연마하여 무기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우는 궁극의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다. 사드는 창과 칼이 아닌가. 선지자들은 창과 칼을 쳐서 보습, 낫, 쟁기를 만들라 하였다(사2:4, 엘3:10, 미4:3)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신다면 사드 논쟁은 국제 정치, 우방국과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화에서부터 출발해야 마땅하다.

세간에는 ‘한방에 간다’는 농담을 한다. 무서운 것은 농담이 진담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사드를 믿고, 우방을 믿고, 상호조약을 먼저 신뢰하는 어리석은 자만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웃으리시로다. 무기를 쌓아놓고 평화를 보장받으려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평화를 먼저 고민하고 실천에 옮기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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