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후예 ‘콥트기독교’… “한국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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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후예 ‘콥트기독교’… “한국에도 있다”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6.07.19 22: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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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인구 10% 콥트 기독교, 기원과 현황
▲ 한국 콥트 기독교 예배처소는 약 10년 전 한 콥트교인에 의해 세워졌다. 바티르 신부가 예배처소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이집트. 정식 명칭이 ‘이집트아랍공화국’일만큼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다. 그러나 국교인 이슬람교외에 전체 국민의 10%, 약 800만명 가량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집트 내 소수집단에 속하는 이 ‘콥트기독교(이하 콥트교)인’들은 현재 이집트 내에서 무슬림들과 큰 갈등 없이 공존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춰 콥트교인들도 세계 여러 나라들로 지경을 넓혀 나가고 있다. 한국에도 이집트 콥트교인들이 들어와 산업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콥트교인은 대략 80명. 10년 전 한 콥트교인에 의해 한국의 예배처소가 세워졌고, 이곳에서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기도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콥트 교황청에서도 3년 전부터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사제를 파송해 기도처를 관리하고 있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기도처에서 콥트교 아시아 담당 순회 사제 필로 바티르 신부와 그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티르 신부로부터 콥트교의 기원과 현황, 한국 내 콥트교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콥트교의 기원

7세기 경 이슬람군대가 점령하기 전까지 이집트는 기독교가 다수를 이루는 국가였다. 콥트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른바 ‘70인역’이라 불리는 최초의 그리스어 번역판 구약성서 셉투아진트(Septuagint)의 출판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는 모든 분야의 최고 학자들을 배출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70인역이 출판됐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히브리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될 만큼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후 74년 마사다 전투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유대인들은 이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고,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기독교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와 이집트인 사회에는 기독교가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복잡한 이집트어를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단순화하여 표기하는 방식을 고안했는데, 이를 ‘콥틱’이라 불렀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콥틱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일컬어 ‘콥트교’라 부르게 됐다.

조금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처음 이집트에 기독교를 전한 사람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였다. 콥트교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가나의 혼인잔치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이후 로마에 있을 때 천사의 지시로 이집트로 향하게 됐다.

마가는 주후 61년에 알렉산드리아 구두 수선공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콥트교의 기초를 세웠으며,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알렉산드리아 항만의 오른쪽 광장에는 지금도 성 마가의 순교 추모탑이 세워져 있다.

 

공존과 핍박

대부분이 정교회에 속하는 콥트교는 레바논의 마론파, 터키의 아르메니아 정교회, 그리고 그리스의 정교회와 함께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종파다. 콥트 기독교 내에도 정교회계 90%와 개신교계 10%가 서로 나뉘어져 있다.

이슬람교와는 공존과 핍박이 교차하는 지난한 역사를 맺어왔다. 처음에는 두 종교가 공존하였으나 점차 피지배세력인 콥트교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화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이집트의 역사를 훑어 올라가다 보면 콥트교 대학살 등 종교적 박해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바티르 신부는 “두 종교가 현재는 큰 갈등 없이 두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크리스마스다. 이집트는 대부분의 중동 국가와 달리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다는 것. 바티르 신부는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 아닌 1월 7일이라는 점은 다르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고 있는 나라에서 기독교 명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다는 것은 파격적”이라고 말했다.

또한 콥트교인들은 1984년 4명이 최초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로 꾸준히 정당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프리카와 아랍권에서 처음 선출된 전 UN 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콥트교인으로, UN 사무총장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집트 외교담당 국무장관에 재임하기도 했다.

친서방 정권 아래에서는 정권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친서방 정권이던 무바라크 전 대통령 축출과정에서 콥트교인들을 서방세력으로 인식한 일부 무슬림계 시위대가 교회 건물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이 콥트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나섰고,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세계 유수의 매체에 보도되며 이집트 내 무슬림과 콥트교인들의 공존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하지만 2011년 10월 교회에 대한 방화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는 기독교인 시위대에 경찰이 총을 쏘면서 27명이 희생되는 사건도 벌어지는 등 무슬림과의 갈등요소는 곳곳에 감지되어 있다.

 

▲ 바티르 신부와 그의 가족. 이들은 이번에 3개월 가량 국내에 머문다. 바티르 신부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한국을 아시아 사역의 베이스캠프로 세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교회와의 만남 원해”

콥트교 사제인 필로 바티르 신부는 아내인 마리아와 아들 마르텔, 딸 나탈리와 함께 이번에 4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보통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국을 방문해 열흘정도 체류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3개월가량 머무를 예정이다.

그가 한국에 오는 이유는 하나다. 한국에 콥트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는 바티르 신부는 한국뿐 아니라 대만과 필리핀, 베트남, 홍콩, 스리랑카, 네팔 등 아시아 국가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 국가를 순회하며 각국에 머물고 있는 콥트교인들을 만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국에 오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가장 발달한 나라이고 안전한 나라”이기 때문.

한국 예배처소는 젊은이들의 거리인 ‘홍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주택가에 있는데다 따로 간판도 없어서 찾아가기 쉽지는 않지만 실내로 들어가면 이내 생각이 바뀐다. 좁은 주택 건물이지만 정교회 예배에 필요한 ‘성소’부터 각종 이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제법 그럴듯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도처로 들어가는 아치와 휘장 등은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해 규격을 지켜 설치했다.

그가 한국에 머무르지 않을 때에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25명~30명, 많게는 50명의 콥트교인들이 모인다.

바티르 신부는 한국이 아시아 사역의 베이스캠프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담당하는 나라 중 가장 많은 콥트교인들이 살고 있을뿐더러 자녀들의 교육에도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판단이다.

한국교회와의 만남도 원하고 있다. 그는 “만남을 통해 한국교회를 배우고 또 한국교회에 콥트기독교에 대해서도 알리는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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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2016-07-21 19:03:52
믿지 않은 세월호의 아이들, 위안부 소녀들은 지옥에 가는 것일까요? 그렇게 믿기에는 우리의 본능적 양심이 이를 거부하지만 오직 예수로 구원받는다 믿기에 천국에 갔다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이 딜레마에 함께 고민하고 답할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https://youtu.be/zxs0wpNMP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