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16]이것이 예화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한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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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16]이것이 예화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한 지름길이다
  • 정장복 교수
  • 승인 2016.06.2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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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구체화시키는 설교예화, 잘못 쓰면 설교 전체 손상
▲ 정장복 교수(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예화가 없으면 설교가 안 된다는 설교자들이 많다. 이들은 적절한 예화만 있으면 설교는 아무 문제없이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문에 대한 구보다 예화의 발굴에 훨씬 노력을 기울인다. 설교를 온통 ‘예화의 진열장’으로 만들고 있다. 설교자가 ‘이야기꾼’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결과 회중은 진리의 내용보다는 구수한 예화에 관심을 더 보인다. 귀가하는 교인들을 붙들고 그들이 들었던 설교에 대한 질문을 하면 본문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예화만을 기억한다. 이때마다 하게 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화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아니한 설교가 과연 참된 설교인가?’ 한국교회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낮았을 때는 진리를 심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예화의 활용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교를 경청하는 수준이 예전과 다르다. 설교분야를 연구하는 어느 조사에서는 지식수준이 높고 신앙의 연조가 높을수록 예화 위주의 설교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비유를 즐겨 쓰셨던 예수님의 말씀사역을 들추며 말한다.

사실 예화는 진리를 밝히 보여주기 위한 한 폭의 그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필요성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화는 메시지를 구체화시키는 도구이다. 둘째, 회중에게 메시지를 각인 시키고 흥미를 유발시킨다. 셋째, 회중들이 메시지를 기억하는데 도움을 준다. 넷째, 예화는 실천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예화이기에 우리의 설교자는 예화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화가 성공적으로 사용될 때는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설교 전체가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유용하고 효과적인 예화의 활용을 위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1)외국에서 번역한 예화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야 한다. 한국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이야기들이 예화로 사용되어야 공감대 형성이 빠르다. 인도의 간디, 아브라함 링컨이니 하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적절한 예화를 찾아 적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2)설교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야기는 최대한 삼가는 것이 정상이다. 설교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때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많다. 설교자가 보이지 않아야 하나님이 보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설교자는 어떤 경우도 자신의 나타남을 억제한다. (3)남이 사용하지 않는 예화를 수집함이 유용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예화를 사용한다면 진부함으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읽은 책에서 발굴한 예화의 활용을 권장한다.

(4)예화의 길이는 짧을수록 좋다. 2분을 넘기지 않도록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고 사용함이 좋다. 필자는 어느 설교자가 한 예화를 가지고 12분을 넘기고 있음을 보면서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그날 그 설교자는 4개의 예화를 사용하였는데 30분 설교에서 예화가 차지한 시간이 25분이었다. 그 설교자는 시간을 메꾸기 위한 방편으로서 예화를 늘려 사용하고 있다는 오해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5)예화의 출처를 밝히는 데 유의해야 한다. 예화의 확실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좋으나 그 부작용 또한 크다. 예를 들어 어느 특정한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라고 말했을 때, 그 신문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설교자가 정치적으로 자신

과 다른 노선의 지도자라고 판단한다. 생존한 인물의 실명을 대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사람과 견원지간인 사람이 있다면 그 예화는 실패한 경우가 된다. 따라서 “오늘 어느 조간신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겪은 이야기입니다”와 같은 표현을 권장한다. (6)예화를 과장하여 들려주는 일은 삼가야한다. 사람이 말을 하다 보면 열이 나고 열이 나게 되면 감정이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는 사실의 선을 넘어 과장을 거듭한다. 회중들은 과장된 예화를 계속 듣다가 종국에는 설교자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7)설교의 주안점마다 예화를 사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예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한하여 사용함이 훨씬 효과적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 설득이 됨에도 예화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버려야 한다.

(8)육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예화는 금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다. 이 죄성이 움직이는 예화의 사용은 그 날의 설교를 실패로 몰고 가는 도구가 된다. 실질적으로 어느 설교자는 ‘죄의 은신처’를 말하면서 어느 퇴폐영업소의 이야기를 아주 실감나게 10분이 넘도록 설명하였다. 그 결과 그곳을 출입한 목사로 오해를 받고 교회를 떠나야 했던 일이 있었다. (9)예화는 원고화 하되 원고를 보면서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예화를 원고화 하는 것은 불필요한 수식어를 줄이고 시간의 조절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예화의 전달을 원고에 시선을 두고 해서는 안 된다. 예화를 말하는 것까지 원고에 의존하는 것은 설교자의 능력 평가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10)예화는 가급적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성향의 것들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는 예화들이 긍정적이고 우러러볼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설교자가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실패한 예화를 사용함으로 고단한 교인들에게 제2의 상처를 안겨주기 쉽다. 그러나 절망을 딛고 굳건히 일어선 인물들, 묵묵히 헌신적 사랑을 실천하는 얘기,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예화들은 그대로 감동으로 전해지며 회중이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예화는 이상과 같은 주의 점들을 유의하여 잘 사용했을 때는 메시지를 가슴에 와 닿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설교 자체를 무너뜨리는 해독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설교가 ‘예화의 진열장’으로 꾸려지면 그 설교자는 삯군의 불명예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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