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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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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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6.2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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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목사·백석신학교 학장

예루살렘 함락(주전 586) 직후의 현장 르포인 예레미야애가는 ‘어찌하여’(애카) 라는 ‘절망 감탄사’로 시작한다. 호국 보훈의 마지막 주간을 맞으며 ‘어찌하여 6·25?’의 교훈을 살펴보자.

8·15 광복 배후에는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에 의해 종교인과 사상범 약 3만 명을 무성무기로 살육하기 이틀 전이었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표가 있다. 

대한민국의 제헌국회 첫 회의(1948.5.31)는 감리교 목사 이윤영 의원의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로 시작되었다. 

김일성에 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9.9)이 세워지기 정확히 만 10년 전(1938.9.9)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며, 국가 예식이라”고 결의했다.

불행하게도 광복절 이후의 한국교회는 일제 수난시대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우상숭배 죄’(레 26:1)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청산하기는커녕, 극심한 분열과 교권다툼에 휩싸였다. 제36회 장로교 총회(1950.4.21)는 깡패를 동원하여 목사가 목사를 죽이려는 ‘공멸의 위기’(갈 5:15)였고, 이어진  6·25 남침은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징계요 긴급대안이었다. 

왜 하필이면 6월 25일(주일)인가? 해방 5주년 기념의 적화통일 전승축하를 위해 매일 10km 남하하면 50일 안에 부산까지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새벽 4시 유성철(총참모장 겸 작전국장)의 공격개시로 남침 3일째에 평양 50km 남쪽인 서울이 함락됐으나, 약 500만 인명손실의 동란을 딛고 1129일 만에 ‘오늘 여기’에 대한민국이 건재하게 된 것은, 수직적인 하나님의 전적 긍휼과 은혜와 함께, 수평적인 소위 ‘춘천대첩’(6.25~28), 낙동강전투, 인천상륙작전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회개 구국기도에 그 해답이 있다.

나라 ‘국(國)’자만 보면(국군, 한국사, 건국, 국민, 국법, 국기, 애국가) 경기를 일으키는 불순세력을 직시하면서, 2,500만 북한주민의 인권·자유·복음의 역사를 위해 정확하고 확고한 역사관, 국가관, 안보관을 가진 ‘생국인(生國人)’으로서, 주어진 부름의 자리에서 호국 보훈의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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