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으로 번 돈, 더 많이 흘려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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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으로 번 돈, 더 많이 흘려보내고 싶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06.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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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회공헌기업대상’ 받은 기업…(주)섬김과 나눔 손석우 대표

원래는 목사가 꿈이었다. 어렵던 어린 시절, 교회가면 목사님이 최고 좋아보였으니까. 주일학교 때부터 전도상을 비롯해 상이란 상은 다 휩쓸며 자란 ‘교회 아이’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를 들어갔다. 일찌감치 결혼해 아내와 독일로 유학까지 갔다. 좋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수억 빚을 지게 된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할 돈도 떨어졌다. 딸아이는 태어났는데, 20만원 전도사 사례금으론 분유 값도 어려웠다. 돈을 크게 벌어 빚도 갚고 다시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교회 밖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섬김과 나눔’ 손석우 대표(아름다운 교회 출석)의 이야기다

▲ 원래 목회자가 꿈이었던 (주)섬김과 나눔의 손석우 대표는 그 동안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극복하고 수육국밥 프랜차이즈로 성공해서 이제 그 이익을 많은 어려운 이들과 나누고 있다. 교회 공동체와 같은 선한 기업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그는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실패와 고생도 성공의 밑거름

“아버지가 어떻게 마련한 창고 부지에서 음식점을 시작했어요. 전 뭐만 하면 돈이 벌릴 줄 알았죠. 계속 말아먹었죠. 오리구이집, 일식집, 포차, 돈까스, 한정식, 황태구이 전문점 등등 하는 족족 망했습니다.”

한때 식당이 잘되기도 했다. 그러나 법인카드 상한제 정책이 시행되면서 손님이 갑자기 줄었다. 어린 나이에 이쪽 경험이 없던 그는 수틀리면 주방장에게 멱살잡이를 당해야 했다. 결국 한 3년 고생하다가 다 접고 취직을 했다. 고물상이었다.

“첫날 가서 하루 종일 피선만 깠습니다. 전선 까서 구리 모으는 거요. 겨울엔 추위 속에서, 여름엔 더위 속에서 고생하며,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어요. 추석, 설날만 쉬고요. 항상 시커먼 얼굴에 코 안까지 검었죠. 여차하면 회장님에게 조인트 까이고, 사람 취급을 못받았어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거기서 겪었습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어느 덧 그 ‘회장님’이 그의 ‘주님’이 됐다. 속물적인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 일에는 최고였다. 돈이 될 만한 일은 다했다. 부정부패가 일상이었다. 심심하면 하나님을 욕하는 ‘회장님’ 곁에서 주일날 교회 가는 길도 잊은 지 오래됐다. 그러나 돈은 좀 만졌다. 빚도 갚게 됐다.

“돈 때문에 눈이 벌게서 살았던 시절이었죠. 친구들은 그 당시 저를 보고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오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많은 교훈을 배우게 됐죠. 결국 거기서 나와서 동생이랑 고물상을 하게 됐어요. 허리를 천 번 만 번 굽혀야 돈 몇 푼 만지게 됩니다. 너무 힘들더라고요.”

결혼반지, 목걸이까지 다 팔아 끼니를 해결하던 그는 우연히 프랜차이즈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그 동안 고생했던 경험과 열정을 쏟아서 일했다. 그곳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눈을 뜨게 됐다. 외식 브랜드로 ‘더진국’이란 국밥을 내놓았다.

“CK(중앙주방시스템)가 가능한 음식을 연구했어요. 제가 식당할 때 주방장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경험이 있잖아요. 주방장이 필요 없는 시스템이니까 창업자들에게 큰 매력이 있죠. 또 어떤 매장에서든지 표준화된 맛을 유지할 수 있고요. 국밥이 가장 여기 적합했어요. 제가 또 부산 출신이라서 돼지국밥을 좋아했는데, 그걸 많은 연구 끝에 특허까지 따면서 맛과 영양과 위생이 조화된 브랜드로 ‘더진국’을 런칭하게 된 겁니다.”

내 돈이 내 돈이 아니다

2011년 2월에 창업을 준비해서 그해 7월 법인 ‘섬김과 나눔’을 세웠다. 짧은 기간이지만 엄청난 집중력과 열심을 쏟아부었다. 2억이란 돈을 투자받아 용인에 작은 생산공장을 지었다. 첫 가맹점이 판교에 생겼지만 연말이 되자 재정이 바닥났다. 새해가 되면 모든 게 끝날 판이었다.

“찾아보니까 중소기업진흥공단 산하 청년창업진흥센타에서 청년 1기를 뽑더라고요. 거기 지원을 해서 교육을 받고 사업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난생 처음 해봤는데 뽑혔어요. 8천만 원을 지원 받아 큰 도움이 됐죠. 그렇게 해서 2012년도부터는 사업이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탄생된 ‘더진국’이란 브랜드는 많은 인기를 모았다. 2011년 시작한 가맹점 사업은 그 해 3억, 이듬해 32억, 64억, 96억 이렇게 매해 성장해 나가 현재 가맹점이 45호점을 돌파했다. 지난해엔 국가의 지원을 받아 경기 이천시 식품화단지에 1천 5백 평 규모의 자체 생산공장(HACCP)을 설립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쓰는 사무실도 다 국가에서 지원받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만큼 저희 기업이 인정을 받고 신뢰를 얻을만한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 지원에 감사하며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고요.”

목사가 되어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은 이제 기업주가 되어 좋은 기업을 만드는 것으로 이뤄지고 있다. 회사명을 ‘섬김과 나눔’이라고 한데서 보듯이, 시작 할 때부터 작더라도 기업의 이윤을 나누는 일에 비전을 두었다.

“국밥이 이렇게 나누기에 참 좋은 아이템이에요. 사업을 시작한 첫해부터 노인복지회관이라든가 기독교 단체 등 여러 봉사 행사에 기부했죠. 어떤 때는 3천명 분, 어떤 곳엔 700인분을 제공하고요. 이렇게 나누다 보니 이번에 상도 받은 것 같습니다.”

그의 회사는 최근 동아일보와 산업통산자원부가 실시한 ‘2016년 존경받는 사회공헌기업대상’을 받았다. 세상을 섬기는 교회를 꿈꿨던 신학도의 꿈이 이제 기업인이 되어 현실화되고 있다. 그가 오너로 있는 회사 역시 교회 공동체와 같은 정신을 지향하고 있다.

“저는 돈에 대해 욕심이 없습니다. 사실 돈을 벌려면 금방 벌 수 있고 그런 제안도 많이 들어옵니다. 이쪽 일에 리베이트가 많아요. 식자재, 인테리어, 포스 등 이권이 많이 개입돼 있거든요. 그러나 전 리베이트를 받지 않습니다. 제가 안 받는 데 직원들이 받을 수 없겠죠. 저는 돈 버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우리 직원들이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오래오래 일할 수 있는 좋은 직장을 만들고 싶어요.”

삯군 목사 보다 좋은 기업가

고물상에서 일할 때에 만났던 ‘회장님’의 교훈이 컸다. 당시 가난한 그에겐 ‘우상’처럼 여겨졌던 그 회장은 돈질을 잘했다. 돈 모으는 데는 귀재였다.

“이가 득실득실한 소파에서 돈이 아까워 자장면도 안 사먹고 매일 사발면을 먹으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돈 다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의 아들이 물려받은 회사는 몇 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회장님 그렇게 되는 걸 제가 봤잖아요. 또 제 아버지도 사업이 여러 번 망한 걸 보고 자랐고요. 제 자신이 물질을 좇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돈만 벌려고 했다면 벌써 엄청 벌었을 거예요. 그러나 전 알아요. 돈이 내 주머니에 있다고 해서 내 돈이 아니란 걸요. 우리 회사에 필요한 돈 외에는 좋은 일 하는 곳으로 다 흘려보내고 싶어요. 저도 월급쟁이에요.”

회사 요직에 전문가들을 세웠다. 능력이 있는 외부 CEO가 회사를 경영토록 하고, 재무 담당 역시 인재를 영입해와 전문가에게 맡겼다. 마치 담임목사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가 아니라 담임 목회자와 부교역자가 팀 목회를 통해 자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교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삯군 목사가 되는 것보다는 이렇게 쓰이는 게 감사합니다. 원래 꿈이었던 목회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인으로 선한 에너지를 다방면에서 주려고 애씁니다. 궁색하게 살기 보다는 좀 베풀고 싶고요, ‘저 사람 뭐냐, 왜 저렇게 사는 거야’, 하는 의문과 ‘아, 기독교인이래’하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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