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권의 문화칼럼]평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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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의 문화칼럼]평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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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5.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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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의 기독교미술 간파하기(42)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예수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럴 것 같은 예수이기에 따랐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했던 예수는 끝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보다 더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잡혀 고초를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니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돌아서고 말았다. 줄 것 같던 복은 안주고 초라한 모습으로 실망시킨 화풀이였다.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요즘 경기가 없어. 경기가 죽었어.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니야?”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갈수록 필자가 듣는 소리들이다. 잘 나가는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부터 조그맣게 자영업을 하는 이들까지 예외가 없으니, 대학을 막 졸업한 청년들과 소통을 하는 필자 같은 이들은 더 애절하게 들린다. 그리하여 지난 정권 후반기부터 심각한 청년 실업을 극복하기 위하여 취업률이란 지표를 대학평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되니 대부분 대학의 오너나 보직자들은 이 지표를 구조조정의 잣대로 사용하여 순수학문이나 예술과들을 폐지하였다. 정부와 대학이 언론을 통하여 인문학을 강조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순수학문의 공동화 현상을 가속화하는데 앞장선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황금이 최고라고 말이다. 그때 거기에 있던 바리새인 같이.

필자는 성경 중에서 산상 수훈을 특별히 좋아한다. 그리고 꼭 제작하고 싶은 말씀이였다. 그렇게 마음만 앞서다가 오랜 기간이 흐른 최근에서야 그 중 팔복을 에스퀴스 하게 됐다. 작품은 팔복을 주제로 하였지만 형상을 넣거나 상황을 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점을 찍고 성경의 내용은 글로 적은 것이 전부다. 어떤 느낌이나 짐작보다 정확한 것이 말이니, 그 말을 적은 글은 오래오래 전달되기에 말이다.

▲ 허진권, 평화를 위하여, 91x86x5cm, Mixed media, 2016

소개하는 ‘평화를 위하여’는 필자의 최근 작품이다. 필자가 수년간 쓰던 붓을 화폭에 붙이고 그 주위에 점을 찍었다. 붓은 동양에서는 文을 상징한다. 그 文은 평화를 상징하고 순수를 상징한다. 따라서 취업이나 눈앞의 황금 보다는 인간 본질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 바로 그 말씀을 기록하는 현실적인 도구역시 이 붓이다. 바다 먹물을 듬뿍 찍어 하늘 두루마리에 쓸 그 붓인 것이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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