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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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04.22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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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개인전 여는 한효순 작가
▲ 그의 그림을 먼저 보고 한효순 작가를 보면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고 한다. 작고 여리게 생겨서다. 붓 대신에 큰 나이프로 그리는 그의 그림은 힘이 넘친다. 강하고 거칠지만 시원시원하다. ‘외유내강’이라고 할까. 적지 않은 시련도 담담히 이겨내며 살아온 그의 인생이 그림 속에 있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그림에 빠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첫 개인전이다. 4월 13일, 첫 개인전을 연 한효순 작가(70, 음암성결교회 집사)는 3개월마다 ‘시한부 인생’을 산다. 지난 2013년 위암 수술 후, 3개월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다. 별 이상이 없다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3개월짜리 소풍가는 기분이다.

지난 해 2월, 그는 1년 후 열릴 개인전을 위해 전시관을 예약했다. 어렸을 적부터 ‘넌 그림을 왜 이렇게 못 그리느냐’는 핀잔을 듣고 미술과목을 포기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미술을 배운지 3년 여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전시될 43점의 그림 중 39점을 그렸다.

아파서 몸을 지탱할 기운이 없다가도 캔버스 앞에 서면 그림이 그려졌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질병으로 몸과 마음이 바스라지는 사람도, 평생 ‘너는 안 돼’라는 덫에 매였던 사람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배운지 몇 년 만에 개인전

“퇴직하자마자 미술학원에 등록했어요. 2011년 12월이었죠. 미술은 사실 학교 다닐 때부터 제일 싫어하던 과목이었어요. 어려서 그림 못 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까 미술이 싫어지더라고요. 성적도 나빠지고, 그래서 평균 점수 깎아 먹는 게 미술이었죠.”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관장으로 있던 그는 은퇴를 앞두고 퇴직하면 무엇으로 봉사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미술치료를 떠올렸다. 그러나 미술치료 자격증 공부를 하던 그는 그림을 못 그린다는 말에 포기해야 했다.

“그때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퇴직하고 나서 미술학원 명화실에 등록하고 미술을 배운 거예요. 처음엔 스트레스가 컸죠. 그런데 우리 선생님께서 단점을 지적하시기 보다는 장점을 칭찬해주시는 거예요. 못 그려도, 느낌이 좋다, 색감이 좋다, 하시면서요.”

그를 가르친 명노선 화백의 평가는 어떨까? 명 화백은 한효순 작가가 “재능이 있다”고 말한다. 기초 데생도 안 배우고 시작했는데도 이 정도 그린다는 건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것. 기술적인 측면만 좀 더 노력하면 기성 작가들 못지않은 실력이라고 평한다.

그림은 젬병이라는 핀잔만 듣고 자라, 학창 시절 내내 미술과목은 포기했던 사람이, 60대 후반 노년에 학원에 등록해서, 데생 같은 기초도 닦지 않고, 불과 몇 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는 것 자체가 그림 같다. 여기엔 그의 ‘고난의 신비’가 있었다.

“2013년 건강검진을 받는데 암이 발견됐어요. 암이 굉장히 진행이 돼서 위뿐만 아니라 대장 까지도 퍼졌더라고요. 거의 말기였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빨리 입원하라고 했는데, 그냥 서산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 버렸어요.”

의외로 그는 담담했다. 이만큼 살았으니 됐다, 정년까지 일도 했고, 아들 장가도 보냈으니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여겨졌다. 괜히 더 고생할 것 없다는 맘에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초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앙의 힘이 컸다. ‘하나님이 불러 가실 때가 됐으니 부르시겠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믿음

사실, 그는 억울할 수도 있었다. 평생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면서 많은 좋은 일을 하고 살았다.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고, 제2회 한맥사회복지사 대상도 받았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홀몸으로 키우면서 해야 할 부모의 도리도 다 했다. ‘왜 내게 이런 병이’라고, 하나님께 원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도리어 순순히 받아들였다.

“저는 사실 좀 미적지근한 신자거든요. 그래도 오래 믿은 믿음이 뿌리가 있더라고요. 힘들 때에 신앙이 큰 힘이 됐어요. 이래서 신앙이 좋구나, 했지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만 살 때가 됐으니 데려가시겠지, 이렇게 맡기게 되고요, 그래서 맘이 참 평안해졌어요.”

큰 병 앞에서, ‘내가 무슨 죄를 지어,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런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다고 그는 바란다. 병원에서 자기와 비슷한 처지로 투병하는 환자들 중에 그런 분들을 많았다. 울면서 원망하고 푸념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들 진서가 맨날 전화를 해서 수술 받으라고 사정사정하는 거예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그러니, 들을 수밖에 없었죠. 수술 받고 항암치료 받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셨어요.”

굉장히 위험한 수술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일 곱 시간 가까이 진행된 수술을 마치고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다른 환자들은 무척 힘들다고 했는데, 그는 구토 한번 없이 마쳤다. 그래도 힘들 때마다 투정부리면, 아들이 의젓하게 곰살가운 얼굴로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 치료받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항암치료 받는데 크게 아프지도 않으셨잖아요, 한 여름 지나 덜 더운 때 받으시는 것도 얼마나 감사해요.’ 며느리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병간호를 해줬다.

몸을 좀 추스를 수 있게 되자, 다시 인천에 있는 화실을 찾았다. 매주 서산에서 인천 화실까지 올라와 그림에 빠졌다. 개인전을 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림 배운지 몇 년 안 된 사람이 개인전을 연다니, 어떤 사람은 기가 막혀했다.

다음 ‘버킷리스트’는 사진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어요. 저질러 놓고 노력하는 스타일이에요. 배짱이 센 편이죠. 직장 다닐 적에도 일에 빠지면 앞뒤 안 가리고 일을 했어요. 그런데 아프고 나니,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퇴직하고 나서 제일 안 좋은 게 목표가 없어졌다는 거였거든요. 그게 굉장히 서럽고 슬프더라고요.”

그림을 그냥 그리는 것과 개인전을 연다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에게 목표가 생겼다. 재능이 없다고 늘 포기 당했던 이들에게, 큰 병으로 앞이 캄캄한 이들에게, 무엇인가 꿈을 꿀 수 있고 도전하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 ‘희망’이 마침내 전시장 벽에 걸렸다. 주제는 ‘덤으로 얻은 삶’. 꼭 시한부 인생이 아니었더라도, 구원받은 신자는 누구나 이제 덤으로 사는 것 아닌가. 전시회 소책자 에필로그는 이런 ‘유언’으로 끝을 맺는다. 일부를 소개하면.

‘나 떠난 자리에/ 따스한 온기 남아있어/ 머무는 이마다/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 떠난 자리에/ 눈물 자욱 남아 있거든/ 이웃을 향해 내밀던 네 손으로/ 닦아줄 수 있을까... 나 떠난 자리엔 환한 웃음과 사랑을 나누는 예쁜 마음 어우러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작은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어/ 그랬으면 좋겠어’

암이라는 질병은 그에게 오히려 창작의 불꽃을 사르게 했다. 죽었다 살아나니, 삶도 달라지더란다. 그전엔 기도를 해도, ‘해주십시오’가 많았는데, 이젠 ‘감사합니다’가 더 많아졌다. 더 내려놓는 걸 연습한다. 그러니, 삶은 그림이 되어가고, 그림은 삶이 되어간다.

다음 목표는 사진이다. 그의 카메라가 몇 년 째 구석에 처박혀 있다. 이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다. 퇴직하면 하고 싶었던 그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다. 하나님이 언제 그를 부르실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하루하루 그 행복한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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