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 시리즈 100> 선교적 하나님, 선교적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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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시리즈 100> 선교적 하나님, 선교적 교회
  • 송기태 선교사
  • 승인 2016.03.2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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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태 선교사/인터서브 코리아 교회관계팀

기독교 연합신문에 ‘선교적 교회 시리즈’를 연재한지 이 번이 100회 째, 기간으로는 2년여를 맞이했다. 이 번 호로 일단 시리즈 연재를 마감하기로 했다. 숨고르기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그 동안 컬럼을 게재해 준 신문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이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선교적 교회에 대한 묵상의 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연재를 통하여 ‘선교적 교회’에 대해 가장 많이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유익을 얻은 사람은 필자 자신일 것이다. 주님의 교회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를 ‘선교적’(missional)이란 중심 주제로 생각해야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삼위 하나님의 본질, 성품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신론(Trinity theology)’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대비되는 가장 중요한 신학이다. 모든 종교는 신이 하나이든지, 다수이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삼위이시면서 하나이시다. 이 삼위일체의 교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형성하는 진수이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행하심이 결국 교회의 어떠함을 결정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에덴에서의 반역 이후에 ‘보내시는(sending)’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최후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또한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missionary God), 즉 선교적 하나님(missional God)이시다. (선교(mission)의 헬라어 원어는 ‘아포스톨로스’로 ‘보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는 보내시는, 선교적 하나님께서 그 구속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우신 대리인이 이스라엘을 잇는 교회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헬라어에서 유래했듯이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주님과 성령님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는 동일하게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이다(요 20:21). 그래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missional)’인 공동체이다. 문제는 지난 2천년 간 세상에서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로서 존재했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역할을 해 온 교회 공동체가 21세기를 맞이 하면서 무엇을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본질이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 어떻게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선교적 교회’에 대한 담론은 분명히 ‘선교적 하나님’(missional God)’의 본질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교회를 통하여 성육신적으로(incarnational) 지역 사회와 세상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열방의 구속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다(출 19:5,6).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열방 중에서 유일하게 선택하셨다는 선민 사상으로 충만했다. 결국 그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목적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막을 내렸어야 했다. 이제 이스라엘 12지파의 전통을 이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세워진 교회 공동체도 동일한 사명과 위험 속에서 존재한다. 즉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고 결국은 자신들 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에 대한 담론은 교회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 부르심과 세우심이 세상을 향하여 보내시는(sending), 선교적 사명에 있다는 것을 도전한다.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 오직 ‘제자도’ 한 길 밖에 없듯이, 교회들이 그 사명에 충실하는 길은 오직 한 길, ‘교회론적 제자도(ecclesial discipleship)’에 있다. 즉 교회 자신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려는 욕심과 교회의 이름을 내려는 욕심을 부인하는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가 자기 십자가, 즉 미션을 분명히 하고 날마다 그 미션에 충실해야 만 한다. 그것이 없이는 어느 교회도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보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에 순종해야 한다. 그럼으로 모든 교회들이 선교적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려면 데렐 구더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의 계속되는 회심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선교적 하나님(missional God)’께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교회들을 향하여 그 꿈을 꾼다. 선교적 하나님께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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