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윤리학에는 배려와 양보없이 투쟁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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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적 윤리학에는 배려와 양보없이 투쟁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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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2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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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 / 창조신학연구소

현대 세속 과학의 우주 기원과 생명관은 분명 진화론에 주로 그 뿌리와 근거를 두고 있다. 진화론이야말로 설득력 있는 과학의 사실이라는 데 주로 근거를 두고 세속 과학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신학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저자들에 따라 다음의 4가지 개념으로 쓰여진다.

첫 번째 개념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원리를 논리적 외삽(外揷, extrapolation)을 통해 윤리학의 영역으로 가져온 윤리학의 체계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투쟁, 경쟁, 선택, 생존과 멸종의 개념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적자생존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해 어떤 윤리적 질서도 없이 오직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은 배려와 양보가 아닌 투쟁 가운데 오직 자신의 개체만이 우월적 생존력을 획득하게 되는 무자비한 승리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모든 질서의 주인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성경적 창조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두 번째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진화되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진화는 목적성도 방향성도 없으므로 당연히 도덕성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결국 진화윤리가 다분히 상황 윤리적임을 설명한다. 그 상황윤리에도 기준은 전혀 없다. 진화의 원리에는 당연히 선과 악의 구분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도덕의 가치도 만들어왔다고 보는데 반해 창조론적 윤리는 모든 물질의 창조는 선하다는데서 출발한다(창 1장). 창세기의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기록함으로 창조론적 윤리와 가치의 규범의 틀을 제공한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이란 다분히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권위를 외면하고 컨텍스트 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셋째 개념은 인류 역사를 통한 인간윤리체계의 발달과 연관된다. 여기에는 윤리가 더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이 개념은 사람이 하등한 윤리 의식을 역사를 통해 고등한 윤리로 발달시켜왔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과 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결과한다는 개념과 상치된다. 선과 악의 개념조차 윤리적 발달 가운데 부각된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윤리적 가치의 발달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창조론적 윤리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타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라고 하였다. 창조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연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요 구현(具顯)이다. 진화론자들이나 진화 윤리학자들이 진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지평 아래에서 해석을 시도한 경우는 전혀 없다.

넷째 진화론적 윤리학의 개념은 채택에 적당한 진화 체계의 본질을 강조한다. 사실 이것은 글로 이해된 일반적인 진화론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윤리체계는 규범적 상태로의 윤리 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이며 알맞은 가치체계와 관련된다. 선과 악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진보적 발달 속에 필요할 때마다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선악의 기준은 없다. 즉 이것도 상황적 윤리이다. 이렇게 진화론적 윤리학이 인간이 역동적으로 필요한 윤리를 채택해왔다고 보는데 비해 창조론적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타락과 범죄로 파괴되어버린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진화론적 윤리학이 다분히 상황적인데 비하여 창조론적 윤리학은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인 윤리로의 회복에 관심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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