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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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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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0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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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호 목사/춘천동부교회

얼마 전 사도바울의 여정을 따르는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순례여정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약 20년 전에 한번 가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번 순례 길은 조금 달랐습니다. 떠나기 얼마 전 터키에서 테러가 나서 불안과 긴장이 더해진 가운데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여파로 막상 현장의 치안은 더욱 강화되어 있었고 여행객들이 적은 바람에 현지인들의 친절한 응대를 십분 누릴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억나는 곳 중 하나가 그리스의 ‘메테오라’입니다.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만큼이나 아찔하게 솟아있는 암벽들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수도원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10세기 무렵 동굴에서 수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후로 많은 수도원들이 들어서면서 16세기경엔 이십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수도원 다섯 곳과 수녀원 한 곳이 있으며 400~500m에 달하는 수직 바위 꼭대기 위에 있습니다. 새 이외는 그 어떤 짐승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수도사들은 이곳을 밧줄을 타고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병원도 있었고 나이든 수도사들이 머물었던 요양원 같은 곳도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왜 이리도 험준한 곳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면서 적대 세력인 투르크족의 침략이 거세졌고, 지속적으로 수도원을 공격해왔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립되어 있고 안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곳은 갑바도기아 지역에 있는 괴뢰메 동굴 교회였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왔다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나왔으니까 약 300여년을 이 지하 동굴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지하 12층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55개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서 어디로 들어왔는지, 어디로 나가야 할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박해자들이 들어오면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갑바도기아 지역에는 이런 동굴들이 많습니다. 동굴들마다 교회가 있고 교회 안에는 벽면이며 천장이며 할 것 없이 그림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성경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들을 통해 다음 세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 바닥에는 해골들이 있었는데 이유인즉 박해 가운데 투철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 오실 날을 소망하며 교회에 묻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장을 보면서 숭고한 그들의 신앙에 절로 찬양이 흘러 나왔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그런데 한 소절도 채 마치기 전에 현지인들의 신고를 염려한 안내자의 부르지 말라는 중단 요청에 다급히 멈추고 말았습니다.

왜 이들이 메테오라 같은 곳에서, 혹은 갑바도기아 같은 곳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뎠을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계 1:9)가 바로 그 이유일 것입니다. 요한은 이로 말미암아 밧모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성지순례의 현장이 마치 그 때 그 시절의 밧모섬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너무나도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불편하고 힘들어도 우리의 믿음이 쉬이 흔들리는 모습을 목회 현장에서 수도 없이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몸소 살아 간 그 삶의 흔적들을 둘러보며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도 저마다의 밧모섬이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 살았던 바위산 위의 수도원들, 바위 속 지하 동굴, 그들이 살아갔던 삶의 터전들, 그리고 이제는 기둥 밖에 남지 않은 교회 터 등 모든 것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대한민국에 도착하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과연 나는 얼마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계 1:9)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새롭게 복음의 열정을 가지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밧모섬을 만날 때에 동굴 속에서 미처 다 부르지 못한 찬양을 마저 부르고 싶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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