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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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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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26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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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 목사 / 백석대학교 총장

마태복음서 18장에 보면 3막으로 구성된 예수님의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18:23-35)가 있다. 1막(23-27절)은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갚을 것을 요구받지만 갚을 길이 없어 임금에게 간청하자 임금이 모든 빚을 탕감해준 이야기를 보여준다. 2막(28-30절)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궁전을 나가면서 자기 빚의 1백만분의 1인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투옥시킨 이야기를 보여준다. 3막(31-35절)은 2막의 내용을 지켜본 다른 동료가 이 일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이 대노하여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다시 소환하여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둔 내용을 보여준다. 3막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된 메시지는 무엇일까? 문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는 1막은 사람 상호간의 용서를 말하는 2막을 위한 것이며, 만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1막)가 우리의 용서를 통해 반영되지 않을 경우(2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취소된다(3막)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수직적 용서와 사람 사이의 수평적 용서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인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인 것이요, 통합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의 합당한 책임적인 응답 없는 하나님의 값싼 은혜의 강조는 진정한 성경적 은혜가 아니며, 행위 없는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열매 없는 나무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찍혀 불에 던져질 나무이며, 성화 없는 칭의의 강조는 바리새인적 신 스콜라주의 신학에 빠질 수 있으며, 명령법 없는 직설법의 강조는 십자가 없는 신학을 양산시킬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바로 알고 적용시킬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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