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미신, 하반신 마비에 폐병도 복음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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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미신, 하반신 마비에 폐병도 복음이 이긴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5.12.24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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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노방전도 30년의 기적
▲ 포천 임마누엘의 집 원장 이석우 목사는 “하반신 마비와 폐병의 아픔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었기에 오히려 고난이 유익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천 임마누엘의 집 원장 이석우 목사

“저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밥만 먹고 똥만 싸다 죽는 인생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고 인생역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인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청량리역 광장에서, 의정부역 광장에서, 서울역 광장에서, 복음을 전해온 이석우 목사의 고백이다. 

온갖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가정에서 자라, 29세의 나이에 공사판에서 두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하고,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토하는 폐병까지 겹쳐, 인생이 암담했던 이 사람, 예수를 만난 후 딴 인생이 됐다.

그는 지금 포천 ‘임마누엘의 집’ 원장으로 아내와 함께 장애인들을 돌보며 포천부활교회를 섬기고 있고 의정부에 하늘소망교회를 세워 매주 2회씩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과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 하루를 절망하며 살던 사람이 이젠 도리어 희망을 이야기 한다. 수많은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눠주고 있다.

예수님 만나 불행이 행복돼
“노방전도하면 별 일을 다 당하죠. 깡패들이 협박하기도 하고, 술 취한 사람이 시비 걸고 폭행하고 어떤 이들은 가래침을 뱉고 제 휠체어를 발로 차고요. 야유와 비난을 받는 건 아무 것도 아니고요. 더 힘든 건 욕창이이에요. 하반신 마비는 이미 제가 당한 일이지만 욕창은 육체의 가시처럼 지금도 힘들게 하거든요. 가만히 집에 있으면 괜찮은데, 많이 활동을 하면 할수록 피부와 닿는 부분에 상처가 생겨, 피와 고름이 섞여 나오고, 그래서 또 수술을 받고요.”

그래도 그는 전도자의 길을 멈출 수 없다.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가정엔 불행이 잇달았다. 3남매가 5살만 되면 갑자기 경기로 죽었다. 여동생은 결혼해서 100일 된 딸을 둔 채 연탄가스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사고로 왼손에 장애를 입었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앓았다. 그 역시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우리 집은 외할머니 때부터 우상을 숭배하던 집안이었어요. 어머니도, 지금은 권사님이 되셔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시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문제만 생기면 점쟁이를 열심히 찾아다녔으니까요. 저도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방황하면서 컸고, 그러던 차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지지대가 무너져 4층 높이에서 떨어진 사고를 당했죠. 모두 죽었는데, 저만 살아났어요.”

눈을 떠보니, 하반신 마비였다. 청천벽력같았다. 살아난 것도, 나중에나 감사했지, 그때는 절망스러웠다. 인생,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정을 구원하고, 지금처럼 소외된 자들을 돕는 사역자로, 전도자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인 걸,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교회를 다녀오면 마음이 평안했어요. 몸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다 저를 떠났죠. 사귀던 여자도 떠나버렸고요.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오히려 크게 저를 위로했던 것 같아요. 장애로 6년 반 동안 방 안에서 살 때 성경을 22번 읽고 묵상했어요. 사람들이 그랬어요. ‘이석우는 장애인이 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고요.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고난이 오히려 유익하고 감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하반신 마비로 절망의 어둠 속에 꽉 갇혀있던 그에게 은혜의 빛을 뚫어주셨다. 청소년 시절부터 폐병을 앓았던 그였다. 병을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을 다 먹고 뱀도 잡아먹어 보기도 하고 절에도 가보고 남묘호랭교에도 기댔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때 비록 육신은 병신이 됐지만 폐병만은 고쳐달라고 애원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난 이제 진짜 죽었구나, 하고 병원에 갔어요. 성바오로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사형 판결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1주일 후에 갔더니, 의사가 그래요. ‘폐병이 나았습니다.’ 제가 어리둥절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내가 너를 고쳤다.’”

 

▲ 임마누엘의 집 장애인들과 함께.

사명 깨닫고 세상 달라져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살다가, 언젠가 ‘병신인데 잘 죽었다’는 소리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장애인이었지만 세상에서 좋은 일 하다 죽으니 참 안타깝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서 기도 중인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회 와서 예배만 드리지 말고 오스카극장 앞에서 전도지를 돌려라.’

“그때부터 청량리 오스카극장 앞에서 휠체어를 탄 채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거긴 병원, 588 홍등가, 역전이 있어서 참 힘들고 어려운 이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죠.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데, 처음엔 멋쩍고 창피해서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하루는, 그때 ‘휴거’라는 유언비어가 소란할 때였는데, 갑자기 제 입에서 말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더라고요.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어떤 이는 내 다리를 붙잡고 울면서 회개를 하기도 했고요. 그 사건 이후로 전도할 때에 큰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지금 그와 함께 인생의 반려자로, 사역의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성심 사모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에겐 놀라운 복이다. ‘아내를 얻은 자는 복있는 자’라는 성경구절을 늘 외고 다닐 정도다. 그가 하는 노방전도, 병원선교, 무료급식, 장애인 돌봄 등 모든 사역들이 아내 없이는 이뤄질 수가 없다. 

“그 젊은 나이에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는데, 누가 좋다고 시집을 오겠냐, 생각했죠. 더구나 5년 동안 교제하던 여성도 제가 다치고 나니 떠나버렸는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내를 만나게 해주셨고요,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장인 장모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어요. 부족하기만 한 저에게 이런 아내가 너무 감사해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주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 신앙과 삶의 평생 반려자인 김성심 사모와 함께

오늘 하루도 기적처럼
아내를 만나면서 장애인 시설에 대한 꿈이 펼쳐졌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옥합을 깨트리듯 돼지저금통을 깨뜨려 섬기던 교회에 헌금하고 기도에 들어갔다. 청량리 용두동에 있는 이층집을 세를 주고 장소를 물색했다. 포천 할렐루야기도원 아래 폐가에서 장애인공동체를 시작했다. 

“돕는 손길이 없어 아내 혼자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느라 힘들었죠. 돈은 더욱 없었고요. 그 와중에도 매일 청량리역 전도는 계속해서 주유비 감당하느라 힘들었고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늘 쌀통의 쌀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더라고요. 시작한지 6개월 쯤 되었을 때는 300평 땅도 살 수 있었어요. 교회 옆 땅이었는데 주인이 불교였어요. 매일 우리를 방해하려고 염불 소리를 틀어놓았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그 땅이 우리에게로 싼 값에 왔어요.”

장애인공동체가 자리 잡히자 그는 노숙자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이것 또한 기적같이 문이 열렸다. 기도 가운데 있을 때에, 한 집사님을 통해 5천만원을 받았다. 그것으로 의정부에 하늘소망교회를 세우고 무료급식을 1주일에 2회씩 시작했다. 늘 어려움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월세나 공과금 따위를 밀려본 적이 없다. 물론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돌봐준 장애인의 가족이 어려운 일이 생기자 저희에게 큰 고통을 주고 모른 척 외면하는 일도 많고요, 저희에게 도움 받은 무료급식소나 쉼터 사람들이 제 사역에 방해를 하고 마음 아픈 배신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했던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맘에 새기며 다시 힘을 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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