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는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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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는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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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0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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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종 박사 (전 칼빈신대원장)

성령의 은사라고 할 때의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charisma)라고 하는 데, ‘거저 은혜로 주어진 선물’의 뜻을 가진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매우 다양한 것으로 신약에서는 증언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개인 신자들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주어졌다는 사실을 관련 본문들에서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교회공동체는 성령께서 그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요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3:16), 성도 하나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롬 12:4-5; 고전 12:12-27; 엡 4:12-16). 특히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하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는 태도와 방식에 대하여 권면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그 지체된 성도들 간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있다.

가르침/교사/목사, 설교, 권면(또는 위로), 나눠줌/긍휼을 베품, 섬김/도와줌, 지도력/다스림(또는 행정)와 같은 은사들은 그 이름들 자체가 이미 교회공동체를 위한 은사와 직분 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눠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 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관련 구절들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런 사실이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초자연적인 은사들’인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 신유, 이적행함/축사, 영 분별과 같은 은사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은사들은 초대교회 때 왜 주셨는지, 사도시대 이후엔 필요 없는 것들인지, 오늘날에 나타나고 있는 그런 유의 은사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지의 문제다.

해석학적 방법론을 따라 먼저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다룬 바 있는 성령 은사들 관련 구절들에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다른 은사들과 구별하여 말하고 있고 은사의 목적 역시 구별하여 다루고 있나? 소위 ‘은사중지론자들’(cessationists)은 그렇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은사들은 계시적 성격과 사도들의 권위에 대한 보증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과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사도시대 이후에도 해당되는 보편적인 성령의 은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어느 관련 구절의 본문에서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즉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특정의 교리적 전제를 가지고 주관적으로 사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 그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또 하나의 반대 이유는 그들이 특히 방언과 예언을 계시의 은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어디에도 그러한 은사들을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주신 ‘성경 계시’ 차원의 계시를 말하는 은사로 보지 않는다.

은사중지론자들에게 방언과 예언과 같은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해줄 사실이 고린도전서 1:4-9과 12:4-31에 나와 있다. 즉 그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증거”로서 주신 것이며 개인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개인 신자와 특히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것이다. 이 목적으로 주시는 은사들 중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사도시대와 신약성경 완성 이후의 시대를 불문하고 그러하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과 각종 사역자들이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기 위해 간절히 은사들은 간절히 사모할 대상이다(고전 14:1, zēloute ta pneumata, “strive for the spiritual gifts,” NRSV). 그것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며”(14:12) 그리고 계속하여 강력하게 (“불 일 듯하게 하도록”! 딤전 4:14) 나타나도록 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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