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신격화된 ‘독재’와 메시야적 ‘우상’에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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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신격화된 ‘독재’와 메시야적 ‘우상’에 저항”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5.09.04 19:5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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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장신대-독일 튀빙겐대 국제학술대회, ‘평화와 기독교의 과제’

‘평화’를 외치면서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일까. 이에 대해 몰트만 교수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디이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평화에 대한 저항과 대치되지 않으며, 이웃을 대리하는 책임이라고 보았다”고 밝혔다.

지난 4일 오전 10시 서울신대 성결의전당 토마스홀에서는 서울신학대학교-장로회신학교-튀빙겐대학교는 국제학술대회를 ‘평화와 기독교의 과제’를 주제로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이 시대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아닌, 억압과 희생당하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조됐다. 이를 위해 인류애를 바탕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로 제시됐다.

▲ 서울신학대학교-장로회신학교-튀빙겐대학교는 국제학술대회를 ‘평화와 기독교의 과제’를 주제로 지난 4일 오전 10시 서울신대 성결의전당 토마스홀에서 개최했다

평화의 시작, 불의에 대한 ‘정의’

첫 강연에 나선 몰트만 명예교수(독일 튀빙겐대)는 “하나님 말씀을 확신한다면 신격화된 독재와 메시야적인 우상에 대해서는 분명히 저항해야 한다”며, 그 때 결과가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표출될 수 있으나 목적 자체가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평화는 전쟁을 끝내는 것 이상이며, ‘정의’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역설한 몰트만 교수는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전쟁은 영웅적 용기와 희생물을 요구한다면, 평화는 용기있고 영리한 행동,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희생자들의 개입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평화는 죽음을 위한 개입과 희생이 아닌 생명을 위한 개입과 희생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 몰트만 교수는 평화과 생명을 위해 저항을 택한 대표적인 인물로 본회퍼를 제시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히틀러의 교회 공격에 투쟁하고, 나치즘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여했으며, 1941년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해 1945년 처형됐다.

이에 대해 그는 “본회퍼는 민중의 억압과 무법적 독재에 적극적 저항해 모범이 됐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세우는 교회와 세계 속 그리스도의 평화를 주장한 평화의 신학자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1939년 본회퍼는 미국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전운이 감도는 독일로 돌아가 독일군 첩보대에 속한 군인들의 저항단체에 접속하게 된다. 결국 그는 카나리스 해군 제독과 오스터 육군 대령을 중심으로 한 저항단체와 함께 1945년 4월 처형됐다.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적극적인 저항을 펼칠 수 있던 이유에 대해 몰트만 교수는 “본회퍼는 교회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의 구별을 반대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부르심이 본회퍼에게는 교회와 국가의 구별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또 이미 1933년 히틀러의 독재가 유대인 대량학살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한 본회퍼는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이를 통해 정의와 자유 안에 있는 평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몰트만 교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부의 불법적인 폭력 행사에 대한 저항은 합법적”이라며, “본회퍼의 ‘적극적 저항’에 대한 결단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나치의 인종주의 독재의 희생자들로 말미암아 유발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난다고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화가 이제 세상에 왔다. 이 세상은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이다. 예수를 우리 세계 속에서 인식할 때 평화의 계명이 가진 의미가 저절로 밝혀진다.”

“폭력에 대한 독일교회의 침묵, 반성 있어야”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폭력에 침묵한 독일 교회의 사례를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의견도 나왔다. 

위르겐 캄프만 교수(튀빙겐대 신학부 학장)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거대한 양쪽 기독교 교파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주(州)에서도 전쟁 개입의 필연성이 역시 의문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애국심을 입증하려고 애썼고, ‘조국을 저버린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개신교 주류 교회들은 전쟁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인 동의했으며, 폭력에 반항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1916년 출판된 예배서의 ‘전쟁을 위한 기도문’을 제시한 그는 “당시 예배에서 ‘평화’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으며, 평화에 대한 본문은 거의 완벽히 사라졌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평화이고, 그 분이 창조하는 평화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안에서는 그리스도로 향하고 이와 더불어 평화로 향하는 명확함에 미처 도달하지 못했다. 주제로서의 ‘평화’는 개신교 교회들 가운데 있는 교회생활 영역에서 폭넓게 사라져 있었다.

캄프만 교수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사적 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현 정치적 관심들에 대한 관점에 대해 어떻게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시대적 반성과 평화의 복음에 대한 바른 신학적 조명과 환기를 요청했다.

평화로 오신 예수의 ‘십자가’

불법이 만연한 시대를 극복할 유일한 평화의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됐다. 

슈베벨 교수(튀빙겐대 조직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었다”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과의 관계를 통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은 평화의 실재를 위한 역동적인 근거”라고 밝혔다.

예배소서에는 예수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혔던 담을 무너뜨리신 ‘우리의 평화’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 모든 인간성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 포함시키게 하셨다는 것.

슈베벨 교수는 “정당한 평화의 조건에 대한 반성이 단지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사회적 실제와 연관돼 있다는 통찰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교회는 반드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교회 공동체’를 통한 평화의 구현을 강조한 슈베벨 교수는 “교회가 도덕적 공동체여야 하고 평화와 정의에 대한 신학적 노력을 다하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시대적 평화를 위해 교회는 세상과의 참여적 연대를 유지해야 하며, 반드시 이 세상을 위한 참여적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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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태 2015-09-08 07:12:08
세계복음화는 계속 됩니다. 인간 세상은 저주와 싸움으로 고생을 계속 당합니다. 해결이 안됩니다. 열심히 헛소리하면서 인간운동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도하세요. 하나님나라가 되어야 한 가족이 되어 평등,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임한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권진태 2015-09-08 07:05:43
인본주의 운동, 인문학운동, 사회운동, 시민단체운동, 정치활동을 하는군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역시 신학교리가 엉망이군요. 신약성경을 모르는, 신약성경에 없는 교리만 만드는군요. 원죄의 저주로 억압, 차별 등이 있는 겁니다. 인간의 저주를 평화운동으로는 안됩니다. 전도를 하는 교리는 없군요. 기근, 기아, 전쟁, 자연재해 등 고난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