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구실에는 닭싸움을 주제로 한 동양화 한 폭이 걸려있다. 고인이 된 화가 운보 김기창의 동생 김기만의 그림으로, 닭 두 마리가 위 아래로 늘어져 깃털을 세우며 싸움을 하고 있는데, 금방 서로를 향해 공격하려는 성난 모습으로 그 기세가 살아있다.
그런데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북의 대치상태가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닭들은 사이좋게 모이를 찾아 함께 다니다, 어느 순간 둘 사이에 성이나 적이 되어 상대방의 깃털을 뽑고 한 판 붙는다.
그러다 언제 싸웠냐는 둥 싸움을 그치고 함께 볼일을 보러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그러한 닭싸움을 닭들의 놀이 정도로 생각한다. 닭싸움은 사소한 일로 빈번히 일어나며 싸움이 끝난 후에는 금방 잊어버리는 일상의 삶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어쨌든 남북의 싸움이 때로는 닭싸움 정도로 생각되는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남북이 닭싸움 수준의 싸움을 반복하고 있다면 정신을 차려 사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닭싸움은 닭들의 싸움이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해야 할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북관계가 닭싸움 정도로 뒤탈 없이, 어린애들 놀이터 싸움 정도로 엉덩이에 묻은 먼지 털어내며 양측 부모들이 허허 웃으며 끝나면 좋겠지만, 때로는 둘 사이의 싸움이 세계의 뉴스가 되고, 많은 인명이 죽어가는 전쟁 수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어 애간장이 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통일
한 예로 지난 2015년 8월에 일어난 남북의 싸움은 결코 닭싸움이 아니었다. 남북이 팽팽히 대치하여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불안과 위기를 남북이 경험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북의 고위급이 만나 수 십 시간의 마라톤협상을 통해 전쟁의 위기를 일순간에 가라앉혔으니, 전쟁 중이라도 대화를 하라는 상식이 먹혀 감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과도 대화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북한을 바라보는 선입견 내지는 편견을 인지하게 되었다.
어쨌든 전쟁을 피할 수 있어 감사했고, 어떻게라도 남북이 잘 지내 평화로운 한반도가 되며, 서로 오고 가는 남북관계 그러다 어느 순간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최근 뉴스로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에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본다. 물론 북한의 지금까지의 행태로는 이산가족상봉을 통해 그 무언가를 남측에 요구할 것으로 예상한다. 순수한 인도주의로 혈육이 만나게 해야 할 것이지만, 북측은 늘 그 무언가를 요구해 왔다. 거기다 이산가족 상봉을 인도주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그만큼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렵기에 인간애를 내세워 우리에게도 인도주의에 서서 도울 것을 요청할 때 한국도 마땅히 그에 대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타당하다. 인지상정이라는 것인데, 어쨌든 남북이 서로의 아픔에 함께 하는 인간애는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을 향한 평소의 끈끈한 사랑과 정이 남북의 사이를 함부로 깨뜨릴 수 없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간 본연의 모습에 길들여져 서로를 막 대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이 남북 간 많으면 많을수록 한반도에는 평화가 오리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 자주 만나야 하고 언제든지 만나야 한다. 아니 커피를 함께 마시며 서로 교제할 수도 있어야 한다.
사실 동서독의 분단 시절에 민간인들은 의제를 가지고도 만났고, 아무 의제 없이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간의 정을 주고받는 일을 소중히 여겼다. 인간사가 너무 업무적으로만 만난다면 무슨 정이 무슨 사랑이 꽃 피울 수 있겠는가! 정부 당국자들이 만나야 할 것이고, 민간인도 끈끈한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지 유지해야 할 것이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통일이 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최소한의 신뢰를 전제로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민간 영역에서 활발한 만남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정부의 법적 조치가 있어져야 할 것이다. 최소한 기독교 NGO의 활동이라도 정부가 너무 정치적으로 제약하지 않았으면 한다.
참으로 어렵게 남북관계가 모처럼 대화무드로 시작되려는데 정부당국자들은 보다 전향적으로 근원적인 조치를 준비하였으면 한다. 너무 기 싸움 또는 체제대결 수준으로 남북관계를 바라보지 말고 형님의 마음으로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큰마음, 큰 사랑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쨌든 민족의 백년대계를 바라보며 꿈을 꾸는 자답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했으면 한다. 모처럼 찾아온 대화의 기회가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로 교류와 협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통일부는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종종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으로 치달을 때 또는 북한이 도발해 왔을 때 국방부와 외교부의 수장이 언론에 나와서 북한을 질타하며 그 책임을 묻는다. 국방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외교부는 그 사안에 따라 중국과 일본 미국을 염두에 두고 대외적 관계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꼴사나운 장면은 이때 통일부도 그 수장이 함께 나와서 북한을 성토하며 나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통일부의 할 일인가? 하는 물음을 종종 갖지 않을 수 없다.
통일부는 남북의 긴장국면을 완화하고 어찌하든지 서로 이해하고 남북이 서로 교류하며 오순도순 살다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함이 그 존재이유라 생각한다. 그런데 통일부가 북한의 잘못을 성토하며 국방부와 함께 북한 침략에 대한 보복과 응징을 내세운다면 뭔가 어색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오래전 통일부를 ‘남북교류협력부’로 바꿀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서로 교류도 협력도 못하면서 통일을 이야기 한다면 이는 평화통일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현실적으로 남북은 서로를 신뢰하면서 교류와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일이 우선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통일부의 할 일은 빈번히 일을 저지른 못된 아들을 나무라고 지적하며 호되게 채찍을 드는 무서운 아버지 역할보다는 그 사이에서 아버지의 꾸중의 강도를 낮추고 아들 편에 서서 그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사랑을 주며 아버지의 성난 매를 말리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북한을 향해 이러한 역할을 하는 통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구하는 내용대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부부처가 어렵다 치더라도 비슷하게라도 이러한 업무가 주어져 있는 민간기관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진영논리를 떠나 그 권위를 대한민국이 인정하면 될 것이다. 사실은 통일부를 헌법기관으로 그 위상을 격상하여 수장은 국회를 통해 임명하고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그 역할을 보장하며 민족의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통일헌장을 국민투표로 통해 선포하고 통일이 결코 그 어떤 한 정권에 속한 문제가 아님을 만방에 널리 알리는 일이 전제 되어야 하겠다. 그래서 정권과 진영논리에 놀아나는 통일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한국교회 실천적 사랑 보여야
한국교회는 어려운 남북관계에서 사랑의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둘 사이의 싸움을 부추기는 시누이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얄미운 시누이 역할을 종종 감당했다. 물론 누가 잘못했는지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은근슬쩍 미운 감정을 보태 판단하는 그런 시누이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지난 세월 가졌던 아픈 상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치유 받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곧 상처를 받았으나 치유된 건강한 사람으로 이제는 북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북한은 한국교회에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의 대상이며, 선교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북한을 향해 보다 다른 신중한 태도를 기도로써 가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해야 할 그들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함께 교회를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제 점점 북한을 잊어가고 있다. 아니 지쳐서 강단에서 그들을 말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통계적으로 통일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이 한국교회에 많지 않다. 게다가 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진영논리에 빠져 있다. 사실 이데올로기는 한 시대의 아들이며, 사람들의 아이디어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없다가도 나타나며,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이다. 칼 맑스(1818-1886)는 19세기의 인물이며, 맑시즘은 시대의 아들 맑스에게 주어진 하나의 삶의 아이디어, 땅에 속한 것이며, 사라지고 있고, 언젠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가 붙들고 있는 복음은 영원불변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지혜로 생명으로 하늘에 속한 것이다. 땅과 하늘만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남북관계를 바라볼 때도 한국교회가 이데올로기화해서는 안 되고, 복음적이어야 한다.
곧 복음의 눈으로 한국교회는 남북관계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다르게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기도하며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거기에 실상은 남북분단을 종식시키고 하나 되는 통일로 나아가는 지혜가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복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를 용서하고 하나 되게 하였던 통일의 복음, 통일의 교과서이다. 복음에는 남북분단을 넘어서는 놀라운 지혜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복음으로 남북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는 한국교회가 되어, 세계복음화에 앞장 서는 사명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북한사랑주일’을 실시하라
한국교회가 어려운 남북분단 상황에서 이제 어머니의 실천적 사랑을 제시할 수 있을 때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사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이 어려운 분단 상황 가운데 두셨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분명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말만 하면 외식이며 위선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남북분단 시대 한국교회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물을 때 분명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 물음은 하나님도 하실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어려움에 처한 북한을 바라보며 ‘북한사랑주일’을 공식적으로 지켰으면 한다. ‘북한사랑주일’에 한국교회가 남북의 교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남북통일을 위한 설교를 하고, 가난한 북한을 위해 헌금하고, 70년 동안 나누어 있어 잘 알지 못하는 북한을 알고 이해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였으면 한다. 그래서 남북통일을 향한 비전을 작은 부분에서라도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북한사랑주일’은 각 교단이 적당한 날을 기념하며 그 주일을 ‘북한사랑주일’로 지내도 좋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그 실천적 사랑이 그 어느 날 통일이 되어 북한사람과 하나 되어 살고, 또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전할 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들이 쉽게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요! 나도 알아요. 한국교회는 그 사랑을 어려울 때 우리에게 보여주었지요! 그래서 그 사랑의 복음을 나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