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속에서 경건을 발견한 만수 김정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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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 속에서 경건을 발견한 만수 김정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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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0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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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찬 교수 / 조지메이슨대학교

김정준 박사는 인간이 먼저 ‘경’(敬)의 마음을 가져야 학문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구약 잠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의 자세가 학문에 대한 바른 자세이다.
그러나 김정준 박사의 경건은 형식에 사로잡힌 소위 종교적이 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경건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해지기 위한 경건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경건은 세속적 삶과 단절된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경건은 이 삶 속의 구체적 정황, 처절한 병고 속에서 죽음의 그늘에서 날마다 경험되는 좌절 가운데서도 힘차게 자기 자신도 억제할 수 없이 솟아 나오는 삶에 대한 역동적인 태도와 결단의 모습으로 경험됐다.

역설적으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依支)에서 삶의 의지(意志)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마산 요양소에서 (폐결핵으로) 누워 있으면서 나비 한 마리가 창문에 붙어있는 모습에서 그리고 그 나비가 살기 위해서 창을 뚫고 나가려는 삶의 의지를 관찰하면서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를 깨닫는다. 그가 가진 경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뿌리박은 내재적인 것이었다.

그의 초월의 개념은 공간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과 분리된 다른 세계가 아니고 오히려 일상생활 속에 깊이 묻힌 초월 즉 ‘땅에 묻힌 하늘’로서 경험했고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순간이 영원과 잇대어지는 경험이었다.

초월이 임재 속에 있고 영원이 순간 속에 있다는 김정준 박사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는 그로 하여금 바로 현재와 여기를 살고 있는 삶 그 자체가 ‘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김정준 박사에게 있어서 그가 경험한 삶에 대한 ‘경’이 그의 경건(敬虔)의 신학을 수립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에게서는 경건과 학문이 분리될 수 없었다. 학문이 참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속에 경건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라는 것이다.

근대는 이성이나 합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태도나 마음의 자세와 아무 관계없이 이성만 가지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 후기의 사조는 우리의 태도, 마음의 자세, 우리의 몸가짐이 우리가 무엇을 알고 어떻게 아는가 하는 인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준 박사는 이미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신학을 한 것이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자세가 달라지고 우리의 존재가 달라질 때 진정한 앎과 깨침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인식론은 이성과 논리적인 생각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근대 후기는 이 명제를 뒤엎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이전 이퇴계나 이율곡 같은 분들이 ‘경’을 인식의 바탕으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바로 김정준 박사의 경건사상이었다. 한 가지 덧붙여 언급해야 할 것은 김정준 박사가 구약 외에도 경건신학에 특히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중세기의 가장 잘 알려진 경건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 출판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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