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가정- “18 세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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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가정- “18 세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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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8.18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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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태 선교사/인터서브 코리아

* 18 세상?
지난 주에 “18 세상”(김성윤, 북인더갭)이란 청소년에 관한 책을 읽었다. 18이란 숫자는 사회학자들이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를 두는 의미로 제안한 숫자인데 그 숫자는 역설적이게도 청소년들이 세상을 향하여 불만과 증오를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는 제목을 ’18 세상’으로 잡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청소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알려고 하는 시도 조차도 잘못하면 구시대의 잣대로 신세대인 청소년들을 분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필자는 네 자녀를 키우고 있고 그 중에서 막내가 16살이다. 또한 중.고등 대안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학부모들과도 기도회를 하면서 점점 더 청소년 이슈가 참으로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슈라는 생각을 더더욱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청소년은 없고 관리 대상만 있다?
저자 김성윤씨는 책에서 “실존하는 청소년은 없고 관리 대상으로서의 청소년 만 존재할 뿐이다”라는 놀라운 선언을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관찰이고 용기있는 고백이다. 어느 캠퍼스 단체 간사의 청년에 대한 글에서도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청년 문제에 대한 말들은 많지만 한 번도 청년들이 이 사회에서 주체로 등장한 적은 없다.” 무슨 말인가? 이 사회의 기득권층인 기성세대는 청소년을 볼 때 우선 미숙하다, 위험하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등등의 부정적인 가정을 가지고 바라 본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청소년들은 언제나 문제를 만들어 내는 문제아(trouble maker)들이고 그렇게 때문에 사회의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규제를 통해서 청소년들을 관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 사회는 청소년이든 장년이든 누구든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도 관리에 해당하는 법을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성 세대들이 유독 청소년들을 생각할 때에는 무슨 범죄자 보듯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이 기독교 계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되는 이유는 자칫 요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다음 세대(next generation) 운운 하면서 청소년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투자를 해야 한다는 구호가 이율배반적인 과정과 결과를 낳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문제아(trouble maker)라는 가정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청소년들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절대로 갖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말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필자는 몽골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살면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다. 몽골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미션을 주님께 받고 왔지만 정작 그토록 원하던 몽골에 와서 몽골인들을 만나고 사귀면서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놀라곤 했다. 그 이유는 몽골 사람들에게 어떤 이유로 분노할 때 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 공산주의자”라는 정죄가 올라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내 안에 있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몽골인들을 사랑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몽골은 러시아 다음으로 1924년에 공산주의 국가가 된 나라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즉 관점을 바꾸자 서서히 몽골인들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성세대들이 청소년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세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경제적 변화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혹자는 “서구가 200년 경험한 근대화를 한국은 30년 만에 경험했다”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지금의 청소년 세대들의 문화를 기성세대들이 공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청소년이었을 때에도 기성세대들에 대해서 동일한 갭(gap)을 경험했던 것처럼…

* 청소년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성세대들이 청소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을 이해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미안하다.” 차라리 이런 고백이 솔직한 것이 아닌가? 어른들이 솔직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솔직한 것을 요구하는 것 때문에 나도, 당신도 청소년 때에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성인이 되었고 사회의 주체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해서 자신은 온전하고 청소년들은 문제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회를 향하여 한 가지 진실을 제시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3-5). 청소년을 청소년답게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육신적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성육신하는 수고와 희생과 겸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청소년들을 생각할 때 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지 모른다. “주님 우리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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