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해 누구도 화를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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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해 누구도 화를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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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8.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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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 이경직 교수

모세는 하나님의 경고에 순종으로 응답하지 않는 파라오에게 크게 화를 내며 그를 떠난다(출 11:8).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는 파라오에게 누군가 화를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파라오에게 화를 내는 모세는 파라오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파라오는 자신에게 화를 크게 내는 모세 앞에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무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이 장면은 마치 모세가 왕이고 파라오가 신하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파라오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조처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한” 일이다(출 11:10). 그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만 할 수 있었지 적극적으로 모세를 벌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힐 수는 없었다.


이는 파라오가 모세를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그 때 파라오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출 5:7)고 명령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더 괴롭혔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할 힘이 이제 그에게는 없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수동적 태도만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파라오의 수동적 저항도 무너뜨리시고자 한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출 11:9)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곳도 이집트 땅이며 그의 종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시는 곳도 이집트 땅이다. 이는 이집트 땅을 다스리시는 분은 파라오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그 백성의 대를 끊어놓고자 했다(출 1:15-22). 유대 왕 헤롯은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여”(마 2:16)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출 1:22)라는 파라오의 명령 때문에 이스라엘의 많은 어머니들이 통곡했다. 헤롯의 명령 때문에 베들레헴 지역에 있던 아기들이 살해되었을 때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마 2:18)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그 통곡의 소리를 기억하시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출 11:5)을 죽이셨다.


하나님은 이집트 백성의 첫 아들들만 죽이시지 않고 그들이 신으로 섬기던 모든 동물들의 첫 소생들까지 죽이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를 끊어놓고자 했던 이집트 백성은 자신들의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해야 했다. 그들의 첫 아들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아들들을 살려달라고 동물 신들에게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우상이 되었던 동물들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첫 새끼들을 잃어버린 동물들이 이집트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파라오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한 이집트인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었던 이집트 신들도 무력한 우상임이 드러났다.
 

이집트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집트 백성의 첫 아들들을 죽이심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아론의 지팡이가 뱀이 되어 이집트 요술사들의 뱀들을 삼켰을 때(출 7:12) 그 일은 이집트에게 경고로 작용했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어지는 재앙들을 통해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요구하셨다. 그러나 재앙이 심해질수록 파라오의 마음은 굳어만 갔으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 타협안만 계속 제시했다. 하나님 백성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왜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시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고난과 아픔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고난이 잃어버린 양의 회심과 회개에 기여한다면 그 고난은 아름다운 보석이 될 것이다.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두었을 때 아흔아홉 마리 양은 원망하기보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마 18:12-13).


그러나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첫 아들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집트의 붕괴를 경험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풀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였다(출 11:7). 개가 지나가는 사람이나 짐승에게 으르렁대듯이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겪는 재앙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자격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들의 분노는 이스라엘 백성 대신 파라오에게로 향한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도리어 이집트 백성의 호의와 사랑을 받았다. 이집트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지 않으려는 파라오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는 일을 좋게 여겼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는 약속을 소망으로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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