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고아들 돌보는 것이 또하나의 큰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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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고아들 돌보는 것이 또하나의 큰 사명입니다”
  • 이석훈 기자
  • 승인 2015.07.2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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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차기현 선교사의 네팔 선교이야기

호주에서 네팔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 이제야 깨달아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아들, 차세대 기독교리더로 세울 것

 

▲ 백석의 유일한 총회파송 선교사인 차기현 선교사 가족들. 아내 우명주 사모와 아들 성민 군과 딸 에스더가 오랫만에 함께 사진 촬영을 했다.

차기현 선교사는 지난 4월 네팔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한국에 있었다. 네팔의 첫 번째 교회인 버순다라 교회에는 우명주 사모와 아들(성민, 13) 딸(에스더, 11) 그리고 현지 전도사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시작한 고아원사역의 부지를 확보해 놓고 기금마련을 위해 한국을 방문해 지진소식을 접한 차 선교사는 놀란 가운데 현지 교회의 상황을 들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두 번째 세운 교회 사택이 전파됐으나 마침 예배시간이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차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새엄마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녔지만 그야말로 교회를 왔다갔다하며 교사와 성가대를 하는 무늬만 교인이었다. 한편으로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를 풍기는 방탕한 생활로 오히려 주위에 믿는 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희망도, 어떤 밝은 미래도 그려지지 않기에 하루하루를 마음 가는대로 육체의 본능이 원하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았으며, 기술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 남대문, 청계천에서 옷을 팔았고, 학습지 영업으로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매일 매일 반복되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던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 그렇게 재미있게 즐겼던 일상들이 더 이상 기쁨으로서 다가오지 않았던 것. 마치 삭개오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게 되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들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당시 교회에서 진행되던 철야기도회에 참석했다. 하나님이라는 분이 있다면 분명 뭔가 답을 주실 것이고, 만약 답이 없다면 깨끗하게 생을 정리해 버리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며칠을 그렇게 보내던 중 드디어 하나님께서 만져주심을 경험하게 됐다. 하염없이 기도하던 중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제압했고, 입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죄악들,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작은 죄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저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해자, 바로 죄인 중의 괴수. 죽어 마땅한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깨닫게 됐다.

26살 뒤늦은 나이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간에는 남대문 식당에서 배달 일을 했고, 6시부터 시작하는 야간 과정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주말과 남는 시간에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1년간의 휴학기도 있었지만 대학을 무사히 마치고 2002년도에 가정을 이루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부족한 점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지금의 아내 우명주 사모를 만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

그리고 2002년도에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2005년 봄에 무사히 졸업했으며, 2006년 5월 목사 안수를 받고 꿈에 그리던 호주로 유학을 떠나 멜번대학교의 디플로마 과정을 졸업했다.

멜번에서는 호주교회와 한인교회를 섬기면서 다문화 선교에 중점을 두고 사역을 감당했다. 이 과정 속에서 여러 인종의 사람들과 교제하게 됐고 특별히 힌두교의 사람들, 즉 인디아 사람들과 많은 교제를 나누며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 종교비자가 취소되었고 그 후 호주 교회에서 영주권을 내준다고 이민 변호사를 알아보던 중 쉐란다라는 네팔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변호사로부터 네팔의 선교사 제의를 받은 것이 지금의 네팔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 변호사가 호주에 사업장이 있고 또 네팔에도 사업장이 있어 비자를 만들어 주고 조금이나마 후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던 것.

▲ 버순다라 라이트하우스교회에서 2013년도에 세례식을 거행했다.

물론 어떻게든 호주에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보다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고 또한 우리의 시민권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깨닫고 차 선교사 부부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네팔 선교를 결정했다.

지원을 약속했던 네팔인 변호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낯선땅 네팔을 밟고 5년 동안 사역을 하게 됐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네팔에 넘어와 1년은 언어공부로 보냈다.

본격적으로 사역을 펼친 것은 4년이 흘렀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현지인들 중 한국에서 고용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또한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이렇게 시작된 곳이 첫 번째 교회이자 학원이기도 한 버순다라 라이트하우스교회다. 현재 6명의 네팔인들이 이곳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네팔 노동자 그룹과 연계하여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즉, 네팔에서 한국으로 가는 노동자들을 교회에 연결시켜 주고 그들이 한국에서부터 귀국할 때 다시 신앙으로 잡아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으며, 노동자 가족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차 선교사는 인재발굴과 인재양성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네팔인들을 한국교회와 연결하는 사역을 하는 것. 그래서 현재 비루와 비제이라는 두 명의 신학생이 공부를 마쳤고, 샴이라는 친구가 공부를 하고 있다. 일반 학생은 선지따와 비샬이 공부를 마쳤고, 새롭게 세 명에게 후원자를 통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버순다라 라이트하우스교회와 싯따빠일라 라이트하우스교회를 개척한 차 선교사는 지방에 있는 작은 교회(비제따교회, 제빵교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지원사역을 하고 있다. 주일학교를 제외하고 50-60명이 예배를 드리는 두 곳의 라이트하우스교회를 통해 12명의 성도들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차 선교사의 선교지 교회이기도 한 따구곳의 비제따교회가 이번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백석 교단의 지원으로 완공을 하고 최근 네팔을 방문한 한국의 교단 방문 목회자들과 감격의 ‘비제따백석교회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곳은 불과 10년전 까지만 해도 옷 없이 살 정도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곳이었으나 복음의 힘으로 교회까지 세우게 된 것이다.

지난 4월 네팔의 대지진으로 9천여명에 가까운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한 가족이 몰살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어머니를 혹은 아버지를, 아내를, 자녀들을 잃게 됐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고아가 됐다.

어느 사회에서나 이유가 어찌되었든 고아는 불쌍한 존재이지만 재대로 된 교육과 양육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사회의 관심밖에 놓여지기도 하며 홀대를 받게 된다. 특별히 힌두 왕국인 네팔이라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고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절대 밝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교적인 차원에서 이 고아들을 바라볼 때 이것은 또 하나의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교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힌두의 아이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싶어도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출석할 수 없는데 이 고아들은 부모들이 없기에 그들에게 아무런 걸림돌 없이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차 선교사는 단지 이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미래세대의 크리스천 리더로 세우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 아이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통해 이들이 고아이지만 세상에서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십자가 용사로서 귀한 일을 감당하는 목회자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한 아이당 먹고 입히며 공부시키는 비용으로 5만원을 예상하고 있다.

현재 7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고, 2명의 아이를 더 받을 예정이다. 현재 고아원을 위해 정부에 정식으로 사회복지센터를 등록하고자 변호사를 고용해 일을 진행하고 있으며, 백석총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매입한 부지에서 기공예배까지 드리게 됐다.

카투만두 외곽 지역에 2층 규모의 건물이 완공되면 ‘지진피해 아동 지원 선교센터’라는 이름으로 아동지원센터와 지역어린이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로 활용된다. 뿐만 아니라 신학생들과 지역 교회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장소로도 함께 사용할 예정이다.

더 나아가 백석교단의 네팔 현지 신학교로 쓰임받고자 기도하고 있다. 이들에게 백석의 복음주의적인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전수함으로 교단의 5천400교회 150만 성도의 비전에 한 축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처음에 저희 주변에 아무런 물적 자원이 없었으나 이제 되돌아보니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차 선교사의 고백이 지금은 비록 어둡게만 느껴지는 네팔의 복음화에 청신호를 보여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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