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만나는] “기독교 신자인 우리, 어떤 악형에도 불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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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기독교 신자인 우리, 어떤 악형에도 불복하자”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5.07.0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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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믿음의 선배들의 저항정신이 깃든 105인 사건

“신문을 맡은 일경의 첫 마디가 ‘네놈은 혈기 있는 강력한 신민회원이다. 기독교 신자로 우리 말은 무엇이든지 듣지 않고…. 지난 석달 동안 유치장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총감부에서 어떠한 악형을 할지라도 불복하자는 결심을 했다는 것도 안다며 주먹과 곤봉으로 마구 때렸다”

1910년 105인 사건에 연루됐던 독립운동가 선우훈이 훗날 자신의 저서 ‘민족의 수난’에 사건 당시 탄압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신민회 사건으로도 불리는 105인 사건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 일제에 저항하던 신민회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한 날조, 조작이었다. 비밀결사조직 신민회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항일 인사들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고, 선우훈의 기록에서처럼 수많은 사람을 고문했다. 특히 1907년 만들어진 신민회에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123명 중 85%인 92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가운데 장로교인 중에는 목사가 5명, 장로 8명, 영수 10명, 세례교인 42명, 학습교인 13명이나 된다.

조선총독부가 1931년 작성한 ‘조선독립운동의 변천’에서는 신민회와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 건의 음모는 신민회의 간부에 의해 행해졌지만, 그들은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 야소교(耶蘇敎) 신자의 유력자였으니만큼 동지로서 가담한 야소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다수 있었다.”

당시 일제가 사용한 잔인한 고문은 72종류에 달했다고 한다. 105인 사건과 관련된 조작은 결국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에도 알려지게 됐고, 재판에 대한 해외 언론들의 관심이 커지자 일제는 당혹스러워했다. 1심에서 기소된 123명 중 105인에 대해 유죄판결이 내려지자 세계 언론들의 비난을 받게 됐고, 결국 2심에서는 105명 중 99명을 석방했다.

105인 사건은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됐다. 전 세계가 일제의 만행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또 당시 통계를 보면 일제의 박해로 잠시 기독교 교세가 위축되는 듯 했지만,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을 더 확산해갔던 저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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