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광야에서 홀로 서계신 예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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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광야에서 홀로 서계신 예수를 만나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5.07.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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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꿈에 그리던 성지 이스라엘을 가다-말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유대광야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로 뜨거운 직사광선이 연일 쏟아져 내린다. 도무지 생물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척박하며 메마른 땅이다. 정말 이곳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찾아 헤맨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맞을까 싶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어있는 것만 같은 메마른 광야에도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광야에서는 수년간 지속된 가뭄 속에서도 작은 빗방울 하나에 꽃이 피고 생명이 싹튼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죽음의 땅이 아닌, 기다림의 땅이다. 유대광야를 걷다보면, 예수님의 피가 닿은 이 땅에 생명의 복음이 피어나길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긴 기다림이 느껴진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6~8)
 

▲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대광야로 들어가는 입구.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신 곳으로 추정된다.

#안녕, 예루살렘

예루살렘 곳곳에는 예수님의 정취가 묻어났다. 예수님의 휴식처였던 감람산을 걸어 내려가면 예수님의 발자국이 느껴졌고, 예수님의 숨결이 닿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가슴이 뛰었다.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깊이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볼거리도 많고 찾을 곳도 많은 예루살렘에서 이틀이라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더욱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질긴 생명력의 유대광야

감람산에서 동쪽을 향해 내려가니 무성한 사막 위에 드넓은 유대광야가 펼쳐졌다. 도시에서 조금 벗어난 것뿐인데 나무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더니 이윽고 한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는 온통 석회암 덩어리를 잘라놓은 듯한 바위산만이 가득했다.

▲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대광야. 온통 돌산과 모래바람 가득한 광야가 한없이 펼쳐져 있다.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지나가자 예수님이 공생애 전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던 ‘시험산’이 눈에 띈다. 시험산 절벽 위 뿌연 흙먼지 사이로 고된 금식기도를 끝내고 홀로 서계신 예수님의 형상이 아른거린다. 잠시 차에서 내려 어딘가에 남아있을 예수님의 흔적을 따라 광야를 밟아 보았다.

모래가 뒤섞인 먼지바람과 40도에 가까운 뜨거운 태양 볕에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차에서 내린지 5분도 못 돼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더욱이 일교차가 심해 광야의 밤은 더욱 춥고 고독하다고 한다. 이 곳, 광야에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40일간 지독한 굶주림과 외로움을 견디며, 사단의 시험에 시달려야 했을 예수님의 마음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차를 탄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득한 광야 너머로 무성한 종려나무 숲이 보인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 사이에 있는 ‘사해(Dead Sea)’에 가까이 왔다는 증거다. 아니나 다를까. 종려나무 숲 뒤로 에메랄드 빛깔 바다물결이 고개를 내민다. 

▲ 에메랄드빛 사해의 푸른 바다는 성지순례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윽고 사해 근처에 다다르자 특유의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황과 불이 떨어져 멸망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사해 근처에 있었다고 하니, 마치 4500여년 전 유황불 냄새를 맡는 것만 같은 섬뜩한 기분이다. 하지만 사해는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외관만 봐서는 아브라함과의 대화 끝에 이곳을 택한 롯의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로 찬란한 모습이다. 암벽 위에 서서 사해를 내려다보니 수평선 아래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

사해 북서쪽의 건조한 평원에 위치한 마사다와 쿰란은 서로 인접해 있어서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쿰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필사본이 발견된 곳으로 1세기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가 세상과 유리된 채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성경을 필사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쿰란 동굴 앞에는 에세네지파의 주거 생활을 추정할 수 있는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는 쿰란에 살았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과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에세네파는 유대인 남자 공동체로 스스로를 ‘빛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철저하게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하며 종말의 때를 준비했다. 모든 소유를 공유하며, 예배와 정결의식, 공동식사 등을 매일 진행했다. 오늘날의 수도원과 비슷한 셈이다. 

▲ 에세네지파의 생활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문서가 쿰란 공원 박물관 내에 전시돼 있다.

이를 둘러싼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1947년 베드윈 목동이 잃어버린 염소 한 마리를 찾다가 쿰란 골짜기의 가파른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우연히 항아리들을 발견했는데, 이 안에 성경을 쓴 두루마리들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후 10년에 걸쳐 근처 11개의 동굴에서 900여개의 두루마리가 대거 발견됐다. 에스더와 느헤미야서를 제외한 성경사본이 전부 있었으니 성경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성경필사본이 발견된 쿰란의 동굴 아래에는 성경필사본을 기록한 에세네파 공동체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와 전시관이 들어서 있었다.

▲ 쿰란 동굴들에서 발견된 성경필사본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전시관 내부에서는 빗, 샌들, 토기 등의 유물에서부터 시작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성서를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일과는 말씀에서 시작해 말씀으로 끝났다.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 이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오늘날 성경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문득 성경책이 쉴 새 없이 출판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나 돌아보게 된다. 

▲ 쿰란 공원 인근에서는 성경필사본이 발견된 동굴들의 외관을 둘러볼 수 있다. 사진은 성경필사본이 발견된 동굴 중 하나.

#광야에서 ‘세례요한’을 만나다 

성경에서 광야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가 세례요한이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세례자 요한이 이 쿰란 공동체의 에세네파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에세네파의 정식 회원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서 활동을 하다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더욱이 쿰란은 세례요한의 사역무대였던 요단강에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생활도 쿰란 공동체 구성원들과 비슷했다. 

실제로 쿰란 공동체의 건너편에는 세례요한의 활동지로 추정되는 종려나무 숲이 있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먹었던 석청(들꿀)은 종려나무 열매로 바위틈에 떨어지면 열매가 녹아 끈적끈적해진 것을 석청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가다보면, 무성한 종려나무 잎 사이로 광야에서 낙타의 가죽옷을 입은 세례요한이 걸어 나올 것만 같다.

▲ 사해에 다다르자 세례요한의 사역지로 추정되는 종려나무 숲이 보였다.

광야를 지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말했던 겸손한 세례요한의 모습이 그려진다. 머리로만 생각했던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경험하는 순간이다. 

#이스라엘 국가적인 성소 ‘마사다’

사해의 서쪽 해안가 끝에는 높은 고원들이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평야 위로 자리 잡은 협곡에서 대자연의 장엄함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사방이 절벽인데 유난히도 높고 봉우리가 반듯하게 잘려나간 협곡이 눈에 띈다.

▲ 유대인들 중 열심당원 960여명이 로마군인에 마지막까지 항전한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마사다. 지금도 이스라엘민족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곳으로 해마다 수 만명의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산이라기보다는 대지 위에 닻을 내린 거대한 배의 모양이다. 이곳은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마사다(Masada)’다. 고원의 길이는 608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304m로 사해 수면에서부터 높이는 396m에 해당한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자 960여명의 유대인 열심당원들과 가정이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2년 후, 공격용 경사로를 타고 로마군이 진격해오자 이들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집단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이러한 까닭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마사다를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국가적인 성소로 여기고 있다. 

▲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마사다에서 내려다본 모습. 마사다의 완만한 지형에서부터 길을 뚫고 로마군인이 공격해온 흔적이 남아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마사다 위에서 내려다본 사해와 유대사막의 경치는 대 자연이 만들어낸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마사다 고원 위에는 헤롯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이 남아있었다.

로마 초기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왕궁과 함께 목욕탕, 곡식창고, 망루 등에서부터 75만 리터의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도 보였다. 고원에 올라가자 이스라엘의 학생들과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마사다의 이야기를 전하며 열변을 토한다. 부모의 설명을 듣는 자녀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 마사다 위에 남아있는 회당터에서 단체 단위의 방문객들이 인도자의 설명을 듣는 모습.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민족을 위해 희생한 독립투사들을 떠올리면 더욱 쉽지 않을까. 마사다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의 역사의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먼 중동의 이방국가라고만 여겼던 이스라엘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날, 어느새 이스라엘에서의 세 번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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