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만나는] 한국 전쟁으로 고통받는 난민을 품은 채드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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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한국 전쟁으로 고통받는 난민을 품은 채드웰 선교사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5.06.2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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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 성공회의 첫 씨앗

채드웰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후반 14년 동안 대한성공회 성장에 기여한 인물이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 동안 보좌주교로서 대한성공회를 지켜내고 토착화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1926년 성공회 해외 선교부에 의해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처음에는 성공회신학교장으로 한국에 내한했지만, 당장 시급한 지역 선교를 위해 충청도 진천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성공회는 심각할 정도로 사제가 부족했다. 이후 배천, 평양 등 북한 지역에서 활동했고, 1932년에는 평양교회 사제 겸 북한 지역 총사제를 역임했다.

1930년대 말,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일제는 한국에 있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되던 1940년대 초에는 채드웰 선교사가 일제 경찰에 의해 단파라디오를 소지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2년 석방과 함께 강제 출국당했다. 강제 추방된 뒤에도 채드웰 신부는 인도양 실론의 콜롬보에서 성 미가엘교회 보좌신부와 교구 군목으로 사역한 후 자신의 조국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채드웰 선교사는 1948년 해방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충청도 청주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전쟁을 당한 피난민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성공회 4대 주교이던 세실 쿠퍼 신부가 북한군에 납치된 상황에서 1951년 11월 성공회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한국 성공회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한국 주재 성공회 선교사 중 선임 사제였다. 채드웰 보좌주교 지도 아래 한국 성공회는 전쟁의 상처와 사제 부족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1963년 은퇴한 후에도 채드웰 선교사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인천과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도왔다. 부산으로 이주해 입양한 딸의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던 채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별세해 양화진 성공회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묘비에는 성공회 성가의 한 구절이 한글과 영어로 기록되어 있다.

주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붙여, 깨끗이 하며 단련하고, 주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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