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만나는]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 미국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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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 미국의 선교사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5.06.2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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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개신교 선교 초창기 교육에 큰 공적을 남긴 베어드 선교사

베어드 선교사는 숭실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신교 선교 초창기 교육을 비롯해 복음 전파에 힘쓰고, 지방 선교에 큰 공적을 남긴 선교사다.

신학교 시절 무디 부흥 운동에 감화를 받아 선교사의 소명을 품고, 당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마펫 선교사의 추천과 존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의 후원을 통해 1891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을 찾았다.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으로 경상도 전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부산 유일의 선교사였던 베어드 선교사는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열어 신학문과 한문을 가르치는 등 선교 초기부터 교육을 통한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7년 평양으로 옮겨 선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사랑방에서 학당을 열었다. 당시 노동을 천시하던 조선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학교 안에 자조사업부를 두어 스스로 작업을 하고 그 수입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했다. 자립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교육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고, 합성숭실대학으로 발전했다. 대한제국 시절 공식 인가된 최초의 대학 과정 학교였다. 숭실대학은 1938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한국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서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105인 사건, 3·1운동과 심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요람이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문서 선교와 저술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1918년 구성된 구약개역자회에 개역위원으로 선임되어 구약 성경을 한글로 번역(개역)하는 일에도 힘썼다.

베어드 선교사는 1931년 평양에서 별세했다. 그의 무덤은 평양 장산묘지 옆에 마련되었다.

양화진에는 베어드 선교사 부부의 무덤을 평양에 두고 온 것을 안타까워 한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1959년에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에는 다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More than conquerors thru Him that loved us.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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