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크리스천인 것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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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리스천인 것이 행복합니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5.06.18 10: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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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동경하는 ‘패션 아이콘’의 감사
▲ 디자이너 고태용에게 젊은이들이 특히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뒤늦게 의상학과를 편입하고 외국에 한번 나가보지도 못했던 27세에 데뷔해 지금까지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외국 물 좀 먹어볼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다가, 공부도 그닥 잘하지 못하지만, 패션의 열정만은 불타고 있는 청춘들에게 고태용은 희망의 아이콘이다.

‘비욘드클로젯’ 디자이너 고태용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핫’한 젊은 디자이너가 있다. ‘비욘드클로젯(beyondcloset)’의 대표인 디자이너 고태용. 한 신문이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직도 노는 걸 좋아한다는 디자이너는 금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신사동 클럽에 ‘출몰’한다. 그리고 주일에는 무조건 교회에 간다. 남다른 ‘성대’의 소유자이기도 한 그는 교회 성가대에서 20년째 베이스 파트를 맡고 있다.”

디자이너 고태용이 궁금해졌다. 그를 검색했다. 일반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기가 크리스천이고, 주일이나 크리스마스 때에는 꼭 교회에 간다는 내용을 자주 언급했다. 더욱 그가 궁금해진다. 그는 누구일까?

 

‘안되면 되게 하라’ 정신으로

27세에 서울 패션위크 2008년 F/W 무대에 데뷔하여 ‘최연소 디자이너’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가장 ‘대중적인’ 디자이너로 알려졌다. 가장 옷을 많이 파는 디자이너라는 의미에서, 또 패션에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많이 접목시켰다는 의미에서, TV 방송에서 대중과 자주 소통하며, SNS 팔로어가 10만 명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대중적’이다.

그에게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다 뒤늦게 의상학과를 편입했으며 외국에 한번 나가보지도 못했던 27세에 디자이너로 데뷔하여 지금까지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집안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외국 물 좀 먹어볼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다가, 공부도 그닥 잘하지는 못하지만, 패션의 열정만은 불타고 있는 청춘들에겐, 이런 디자이너 고태용은 희망의 아이콘이다.

▲ 패션쇼 백스테이지에서 무대에 나갈 모델들을 피팅하고 있는 고태용 디자이너(맨 오른쪽).

“어렸을 때는 싸움도 많이 하고 거칠게 자랐죠. 서울대 간 누나와는 완전 달랐어요. 저는 집안에서 사고만 치지 말고 자라라, 이 정도였죠. 처음엔 백석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어요. 제 성적에 맞춰서 들어간 가죠. 자연히 들어가서 제 적성과 안맞는 걸 느꼈고요. 해병대 제대 후 편입을 해서 가톨릭대 의상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도 디자이너에 대한 거창한 꿈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옷 사고 쇼핑하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그에게 의상학과가 그래도 가장 ‘익사이팅’하게 보였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처음 찾아간 패션쇼. VIP도 아닌 학생들은 맨 끝에서 까치발을 하고 무대를 봐야 했다. 그런데 피가 뜨거워졌다. 패션쇼 장의 조명, 음악, 공기까지 그의 마음을 달궜다.

“대학교 4학년 때에 쇼핑몰에서 알바를 해서 천만 원을 모았어요. 당시 패션쇼는 5천만 원 이상은 들었는데, 저는 그 돈으로 도전해본 거죠. 지원자들 중에서 경력도 가장 부족하고 나이도 제일 어렸지만 해병대에서 배운 게 있거든요.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당시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심사위원님들이 저에게서 뭔가 재기발랄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가장 어린 나이에 디자이너로 데뷔했지요.”

그때 함께 데뷔했던 디자이너들은 다 그보다 조건이 좋았다. 유명한 외국 패션 스쿨을 나오고, 유명 디자이너의 자녀에, 경력도 화려한 친구들이었다. 잡지마다 그들을 주목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름부터가 친근한(?) 국내파 고태용, 그 혼자만이 오늘까지도 주목받는 젊은 디자이너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패션쇼가 끝나고 KBS에서 새 드라마 의상 협찬 제의가 왔어요. 그게 바로 ‘꽃보다 남자’였습니다. 지금 한류스타가 된 이민호 등이 그 드라마로 처음 유명해졌죠. 그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서 저희 브랜드도 잘 알려지고 많은 수익도 얻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죠”

그 이후로 오늘까지, ‘비욘드클로젯’은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가 내놓는 옷마다, 브랜드마다 인기를 얻고 있다. 디자인이 아닌, 경영에서는 어려움도 겪었다. 이른 나이에 성공해서 직원들을 두고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로 인해서 디자인이 막힐  때도 있었다.

“그때 기도를 많이 했어요. 또 어떤 선택의 순간에 기도를 더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서울에서 잘돼서 뉴욕 컬렉션을 하고 싶은데 돈이 많이 들거든요. 이게 맞나, 틀리나,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잘됐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기도가 큰 힘이 됐지요. 어머니는 정말 신실한 크리스천이시죠. 일 년 내내 새벽기도회를 쉬지 않고 개근하시고요,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주십니다.”

그의 친가인 아버지 쪽은 기독교였고, 외가인 어머니 쪽은 불교였다. 어느 날 큰 엄마의 전도로 온 가족이 인천성산감리교회(담임목사:최상용)를 나갔다. 그가 열 살 무렵이었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어렸을 때에 악몽을 많이 꿨어요. 집에 들어가면 항상 귀신같이 머리 긴 사람이 안방에서 뒤돌아 서있는 거예요. 일주일에 서너 번씩 꾸니까 너무 무서웠죠. 그런데 큰엄마 전도로 교회를 처음 나간 그날부터 그 무서운 꿈을 안 꿨어요.”

스스로 ‘날라리 신자’라는 그는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꼭 부모님과 교회에 나가는  철칙을 고수한다. 그의 철칙은 또 있다. 스스로 “노래 잘 못한다”는 그는 중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20년째 성가대 베이스 파트를 맡고 있다. 디자이너답게(?) 평소엔 금속 징이 박힌 셔츠에 단추도 서너 개 풀고 반바지에 군화를 신고 어슬렁거리지만 주일엔 항상 깔끔한 셔츠에 단추도 하나 이상은 스스로 금지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방탕하게 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조심스럽게 살게 되고요, 그분께서 나를 붙잡아주시는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인 건, 주일날 교회를 되게 일찍 가요. 그래서 토요일 밤에는 외출을 자제하게 되고요, 그런 생활이 제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아요.”

주일 아침에 교회 가는 ‘행복’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치열하게 일을 하는 그로서는, 주일 아침에 좀 늦잠을 자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오전 9시 이전에 벌써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장로님 아버지와 권사님 어머니 때문에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로 툴툴거리며 나가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풍경도 영원할 순 없다. 부모님과 함께 주일 아침에 교회 가는 길이 그래서 그에겐 더없이 소중하다.

“어머니가 항상 제게 해주시는 성경말씀이 있어요.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는 잠언 말씀이죠. 제가 일찍 패션 디자이너가 돼서 잘됐고 방송에도 자주 나오고 젊은 애들이 많이 알아주니까 으쓱댈까 봐요. 늘 조심하라고 가르쳐주세요.”

벌써 수십 년 째, 그의 집안에서 무슨 명절이나 행사로 모였다 하면 빠짐없이 부르는 애창곡,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신앙의 길을 가는 게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반 매체와 인터뷰할 때나 아니면 제 SNS에 교회 가는 것, 제가 크리스천인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올립니다. 제가 크리스천인 것이 어떤 사람들은 안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참 행복하거든요. 누군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요. 또 그런 신앙을 통해서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이뤄지는 결과를 봐왔어요. 그게 너무 감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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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어리움 2019-11-06 13:15:43
기사자료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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