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믿음의 씨앗이 교회로 자라나 ‘사랑의 양’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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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믿음의 씨앗이 교회로 자라나 ‘사랑의 양’을 키웠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5.04.29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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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130주년 기획③ 여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굳은 절개를 찾아서
▲ 손양원 목사

예수 그리스도 이후 2천년 세계교회 역사에 비하면 한국 기독교 130년의 역사는 한없이 짧기만 하다. 그렇지만 130년, 그 순탄치 않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믿음의 선진들은 적지 않았다. 그들의 흔적을 간직한 유적지들 가운데서도 전라남도 여수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신앙 유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순교성지이다. 
민족의 비극적 역사 한복판에서 순결한 믿음을 지켜내고, 동시대에 가장 멸시받던 ‘한센인’들의 곁을 지켰던 故 손양원 목사의 삶과 가르침을 여수에서 찾아본다.

▲ '손양원 목사 순교 유적지 테마공원'이라 불리는 애양원 전경

손양원 목사의 순교지, 여수
여수 기독교 유적을 떠올릴 때면 대부분 애양원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여수 시내 둔덕동에 위치한 손양원 목사 순교유적지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가 끝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 공산당에 의해 총살된 현장이다. 시내를 지나가는 도로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놓칠 수가 있는 장소였다.
덩그러니 기념비만 있던 이곳은 지난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 맞춰 새 순교비와 조형물이 조성돼 소박한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형물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사랑’ ‘화해’의 표현이 담겨 손양원 목사의 가르침이 찾는 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수시내에 먼저 도착했다면 손양원 목사 순교유적지를 돌아본 후 애양원으로 떠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 손양원목사 유적공원(순교기념관)

‘애양원’의 역사적·사료적 가치
여수 시외로 조금 벗어나면 도착하게 되는 여수시 율천면 신풍리 1번지 애양원, 이제 이곳은 ‘손양원 목사 순교유적지 테마공원’이라고 불린다. 역시 여수엑스포 시기에 선교유적사업 일환으로 정부와 순천시, 기독교계가 뜻을 모아 공원으로 조성했다.
입구에 자리한 애양원병원(1909년 설립)을 지나 야트막한 숲길을 잠시 오르면,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석조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눈에 봐도 지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성산교회 예배당이다.
성산교회는 원래 1909년 광주선교부가 ‘한센인’을 전도하면서 광주 양림동에 설립했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병원을 여수로 이전하면서 교회도 1928년 터를 닦았다. ‘애양원’의 의미는 ‘사랑으로 양을 기른다’는 것. 교회 이름도 ‘애양원교회’로 사용되다가 1982년부터는 ‘한센인’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난 후 지금의 ‘성산교회’로 불리고 있다. 
교회 정면 왼쪽 상층부에 보이는 종탑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옛 시골교회의 정을 느끼게 한다. 양 옆으로 트인 계단을 따라 오르면 들어갈 수 있는 본당. 손때 묻은 장의자와 깊은 그늘에 드리워진 긴 햇볕이 경건한 기운을 감돌게 한다.
성산교회 예배당은 2002년 등록문화재 32호로 지정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원래 지어졌던 예배당은 1934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고, 그 이듬해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석조건물이다.
예배당은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이기도 하다. 손양원 목사는 1937년 7월 애양원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고, 이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일장기를 교회에 부착하지 못하도록 하다, 1940년 일제에 의해 붙잡혀 해방이 될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했다.

▲ 등록문화제 32호로 지정된 성산교회 예배당은 1935년 석조로 지어져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산교회 정면 앞에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비가 있고, 바로 인접해 애양원 역사박물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박물관 건물이지만, 예전에는 입구에서 봤던 애양원병원이 이곳에 자리했었다. 박물관 역시 등록문화재로,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병원의 임시 병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박물관은 2층 건물로, 실내에 들어가면 예전 병원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형태가 잘 보존돼 있다. 진료실, 입원실, 수술실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방에는 당시 ‘한센인’과 희귀질환자들의 사진, 세월의 흔적이 담긴 의료장비, 미국 의료선교사들의 활동모습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 보존된 자료들은 의료역사 연구자료로 가치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과 ‘믿음의 절개’ 담은 공원
애양원 역사박물관에서 나와 조금 더 안쪽으로 걸으면, 잘 조성된 너른 공원을 마주하게 된다. ‘손양원 목사 순교유적지 테마공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만 자리하던 곳이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배려한 휴식공간이 잘 마련돼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념탑. 다소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개인적으로 아쉬움이지만, 금빛 기념탑은 손양원 목사의 아홉 가지 감사와 순교의 열매를 상징하고 있다. 아홉 가지 감사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좌익청년 안재선에 의해 살해된 후 손 목사가 장례식에서 남긴 글이다.
감사할 것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순간에 손 목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찾았던 감사. 지금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살해했던 안재선이 붙잡혔을 때 직접 구명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후세대들이 손양원 목사를 가리켜, 다소 과격한 어휘를 사용하면서까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1993년 지어진 기념공원 내 순교기념관에는 6.25 당시 손양원 목사가 순교당한 후 장례식에서 찍은 가족 사진에 ‘안재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밖에 순교기념관에는 손 목사의 생전 유품과 그 당시 사진, 육필원고, 성경책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이야기. 손양원 목사가 ‘한센인’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장면을 담은 그림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 손양원 목사와 아들인 동인, 동신의 묘소

순교기념관을 나오면 여수와 관련된 순교자 12명을 각각 기리는 석판이 있다. 이곳을 지나 솔숲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손양원 목사의 삼부자 묘지에 다다른다. 여수의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비석들과 묘지. 묘소를 찾는 이들은 손양원 목사와 그 가족들의 순교 역사가 그저 글이 아니라 생생한 역사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했다. 또 목숨을 걸고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고, 민족을 향한 절개도 굽히지 않았던 선각자였다. 암울했던 민족의 역사, 고난의 교회 역사 한복판을 살았던 손양원 목사의 삶이 선교로 130주년을 사는 우리에게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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