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도회서 시작된 통일 불씨, 독일 전역으로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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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도회서 시작된 통일 불씨, 독일 전역으로 퍼지다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5.04.14 23: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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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교회에서 시작된 독일 평화통일운동
▲ 독일이 분단국이었던 1982년, 동독 라이프치히 중심에 위치한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평화기도회가 열렸다. 당시 평화기도회에 참가한 동독 시민들은 기도회를 마치면 촛불을 들고 평화 행진을 했다.

지난해 3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그리고 드레스덴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을 제목으로 대북 원칙을 발표했다. 평화통일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를 구축하고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며 △남북 주민 간 동질성을 회복한다는 목표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지난 3월 27일, 드레스덴 선언 1주년을 맞아 ‘통일, 그 길을 묻다’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대한민국평화통일국민문화제 조직위원회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는 독일 평화통일을 몸소 겪은 독일의 각 분야 지도자들을 초청해 진행됐다. 군다 로에스텔(전 독일 녹색당 대표),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라이프치히 교회 지도자) 등이다.

특히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는 독일의 평화통일을 이끈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St. Nikolai kirche)의 ‘월요 평화 기도회’를 이끌었던 중심 인물이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던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보네베르거 목사는 평화 기도회를 어떻게 이끌었을까.

성니콜라이교회는 독일 중동부 상업도시인 라이프치히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1165년에 처음 건축되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유스투스 요나스부터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도 관련이 깊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한때 부목사를 맡았던 교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이 교회가 독일 통일의 ‘불씨’였다는 사실이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평화 혁명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다. 평화 기도회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교회 입구에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을 놓았다.

기도회를 담당했던 보네베르거 목사는 “니콜라이교회는 많은 동독 시민들을 보호해주는 장소였다”며 “교회 안에서 사회주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대중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더 많은 분열을 일으키게 했고, 분열은 교회 밖에서 더 심화됐다. 그는 “폭력시위로 이어지던 중 우리는 비폭력을 지향하며 통일을 향한 평화기도를 하기 시작했다”며 “사회 분위기는 변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동독과 서독의 평화 통일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동독의 체제상 이들에 대한 비밀경찰의 감시는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 하지만 ‘교회’는 비교적 정권의 통제를 덜 받던 곳이었다. 또한 동독 교회를 지켜내려는 서독 교회의 지원, 유럽 사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회를 연다는 명분과 동독 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된다는 동독 정권의 대외 선적 때문에 ‘월요 평화 기도회’는 가능했다. 때문에 독일 통일 전 교회는 동독 내에서 탄압받던 재야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9년 9월 4일 평화기도회가 열렸던 날에 대규모 거리 행진이 열렸다. 사람들은 평화기도회 후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민들도 함께했다. 경찰의 강력한 경고에도 대중들은 더 몰려들었고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약 1천명의 시민들이 ‘자유’를 외쳤다. 경찰의 무력진압이 시작됐고, 70명의 재야인사들이 체포됐다. 하지만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그 후 2개월은 동독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1주 후 9월 11일 월요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평화기도회가 ‘월요 시위’가 된 것이다. 비록 경찰의 체포와 강제 진압으로 그 다음주 월요일 9월 18일는 거리행진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9월 25일, 평화기도회 후 성니콜라이교회 앞 광장에는 약 1만명의 시민들이 모였고,저항운동은 더 거세져 갔다. 그 다음주 10월 2일에는 2만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라이프치히 중심부 성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평화 기도회’는 당시 교파를 초월한 종교인사, 재야인사와 국민들이 함께 이뤄낸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장벽 붕괴 한달 전 1989년 10월 9일, 평화 기도회 후 월요 시위에는 무려 7만명이 가담했다. 동독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거대한 원을 그렸다. 그리고 ‘비폭력(keine gewalt)’을 외쳤다. 작은 불씨는 커다란 불길이 되어 동독 전체로 번졌다. 자발적으로 폭력 자제를 요구하며 “자유”와 “자유선거”와 “정치범 석방”을 외쳤다. 무력으로 시위를 중단시키려 했던 동독 정부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운동의 승리였다. 10월 16일에는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고, 12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평화시위에 참여했다. 이날은 경찰이나 군인도 함께 참여했다.

통일연구원 김영윤 선임연구위원은 “그날을 기억하는 독일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돌을 들지 않았고, 경찰도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평화기도회는 점점 확대되어 월요 시위로 이어졌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틀 후 동독 사회주의 권력의 중심점이었던 에리히 호네커 수상이 물러났다. 그는 재임기간 중 그토록 탄압했던 교회의 도움을 받아 동베를린 소재 소련야전병원으로 도피했다. 그 후 구소련 망명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3주 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동독 정권과 군부는 러시아(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동맹 상태에 있었다. 이주를 희망했던 이들과 반정부주의자들이 동독을 떠나면서 정부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을까. 아니었다. 중국의 천안문 사태를 알고 있었던 동독 청년들은 정부의 진압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평화적으로 기도하며 행진했다. 이례적이지만 오히려 동독 정권 관계자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의 미하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펴면서 동독은 국민들 스스로가 일어설 수 있었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를 필두로 하던 당시 독일의 정치가들은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통일을 용감하게 이끌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국가들도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폴란드 노동조합인 솔리다르노쉬치가 처음으로 자유노조를 외치며 사상을 공유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반체제 운동에 작성된 ‘헌장 77’도 동독의 자유를 더 고조시켰다. 당시 헝가리 외무장관을 지냈던 줄러 호른 또한 헝가리의 국경을 개방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가 소련의 독재 기간을 극복하며 강박한 체계 속에서도 자주적인 생각이 가능함을 보였다. 그리고 이는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의 평화 통일에 자극제가 된 주변 국가들에게 평생 감사하고 있다.

▲ 성니콜라이교회

한국이 독일과 역사와 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 중국, 베트남 등 이웃 국가들이 한국 통일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독일이 평화 통일을 이룬지 25년이 되었다. 독일의 평화 혁명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갔다. 사회의 모든 영역들이 눈에 띌 정도로 평화 통일의 영향을 받았다. 동반성장하며 환경을 개선해나갔으며, 동독에서의 직업 및 교육 경험은 동일하게 인정되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쳤다.

오늘날 독일의 20대는 동독, 서독 출신을 따지는 이들이 없다. 지역 사투리를 가지고서도 동독이나 서독 출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 분위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동반성장에 참여하고 잣대를 두고 구분짓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단순한 행운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독일 통일은 항상 준비 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드레스덴 선언 1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제를 맡았던 독일 녹색당 전 대표 군다 뢰스넬은 “결정적 순간을 잡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며 “한국도 마찬가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해 준비된 사항들이 잊혀지거나 의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한국은 독일의 예를 통해 과거의 우리보다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과거의 내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것처럼 북한 주민들 또한 이를 갈구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근 북한은 남한 정부가 “드레스덴 선언 1주년을 맞아 성과가 있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경색된 남북관계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서툰 말장난”이라고 비난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책임 회피를 위한 뻔뻔스러운 말장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남관계가 파국에 처한 원인은 괴뢰당국이 외세와 야합해 반공화국 압살 야망을 획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남북관계가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가운데 남북교류협력에 대한 정부의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인도적 문제 해결의 핵심인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한 번도 열리지 못했고, 국제기구의 모자 보건 사업 지원과 민간단체의 영양식 지원사업을 승인한 것이 대북지원의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통일을 위해 애썼던 서독교회들과 다르게 매우 소극적이다. 호국의 달 6월 즈음에나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잠시 기도할 뿐이다.

북한의 평양 장대현교회가, 개성공단교회가 북한의 평화통일의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을 적극 활용해보는 건 어떨까.

평화 통일 독일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통일 전부터 많은 독일교회들이 준비하고, 통일 후에도 동반성장을 이어나갔던 것처럼 남한과 북한의 교회도 통일을 이뤄낼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정부를 적극 활용해 나가야 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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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2018-02-05 07:27:32
참 아름다운 역사의 흔적입니다
정독하는 동안 내내 부럽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지금 2018년 2월3일 우리에겐 어떤 역사의 페이지가 앞으로 펼쳐질까....
그것보다 우리도 저들처럼 그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 무책임한 뎃글을 다는 것 같아.....
지금
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