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검정고시 26세, ‘지성의 전당’에서 교수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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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검정고시 26세, ‘지성의 전당’에서 교수로 거듭나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5.04.0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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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가난한 시골 소년이 법대 교수가 되기까지
▲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절망을 먹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숱한 인생의 고비마다 다시 일어나는 ‘부활’을 경험했다. 주검처럼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면 당신도 ‘부활’할 수 있다고.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정형근 교수

전남 강진군의 “완전 시골”에서 자란 한 소년이 있었다.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친구들이 중학교 교복을 뽐내고 다닐 적에 그는 1년 동안 나무꾼으로 살았다. 소년이 책을 뒤적일 때면 아버지는 호통을 쳤다. “이름 석 자 쓰면 되는데 공부는 뭐 하려 하냐”는 거였다. 누나의 도움으로 4남매 중 유일하게 중학교 졸업장을 탔다.

그때 나이 벌써 18세. 어린 소년이 청년이 되어가는 나이였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는 26세에 통과했고, 대학은 28세에 들어갔다. 졸업 후 4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품었던 꿈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정형근 교수의 이야기다.

이렇게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진 그의 학력 연대기를 생각하면, 지금 ‘지성의 전당’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 자체가 인생역전이다.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꿈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고, 초등학교 때 상장 한번 받아 본적 없으니 머리 또한 그리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었던 한 시골 소년의 꿈을 따라가 보자.

“늦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에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독서실 청소를 해주면서 먹고 자고 공부했죠. 그때 옆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나와 공부하는 형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엔 중학교 나온 시골 촌놈이 사법고시 공부를 같이 하고 있는 게 말도 안되게 보였겠죠.”

그 선배들의 조언을 받아서 9급 공무원시험으로 목표를 바꿨다. ‘빵’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 고려도 있었다. 22살 되던 해에 검찰직 공무원에 합격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다시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에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서울신문을 올려놓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절에 가서 불자될 뻔 했는데

“앞으로 사법고시 응시자격을 법대 졸업자로 한정한다는 기사를 본 거에요. 그때 마침 제가 검찰직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절에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사를 보고, 중학교 졸업으로 사법고시 보려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이 사회가 법대 출신을 원한다면 나도 거기 맞춰야겠다는 마음에 당장 그날로 고교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어요.”

사실 그 기사는 그런 공청회가 열린다는 기사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사를 통해서 대학을 가게 됐고, 오늘 교수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마 그때 절에 갔으면 ‘불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필연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신문기사를 통해 그의 인생을 목적하신 바대로 끌어당기셨다.

각박했던 시절이었다. 문을 열면 남산타워가 보였던 답십리 산동네. 거기서도 맨 꼭대기. 밤이면 하루 종일 인형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 리어카에 고무다라 싣고 팔던 형,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가 파김치가 돼서 모였다. 어느 날은 고무 대야를 하나도 못 팔아 온종일 쫄딱 굶고 들어온 형을 보자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폭발했다.

“그 당시 교회 목사님께서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욱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보다 더 큰 환난이 어디 있느냐, 목사님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구나,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 학교에서 법철학 강의 때 들은 무신론적 이야기가 맞다, 이러면서 반발심이 생겼어요.”

그 얼마 후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어머니와 형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신고하러 경찰서에 가는 길에 교회가 보였다.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믿음을 가졌더라면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웠어도 이보다는 더 즐겁게 살았을 것인데….’

후회와 회개가 밀려왔다. 말씀 앞에 두려움이 생겼다. ‘네가 고시에 붙는 걸 못보고 가면 눈을 못 감을 것 같다’던 어머니, 정말 눈을 뜨고 가셨다.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리며 합격을 다짐했다. 그 후 대학을 마치고 36세의 나이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 정 교수의 책상 위에는 항상 성경책과 찬송가가 놓여있다. 틈틈히 성경을 읽으면서 맛보는 기쁨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자양분이 될 때가 많다. 그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시편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폐차 될 정도의 교통사고에서도 살아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변호사 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지금 변호사 업계가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다”라는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3년 만에 개업비용 대출금도 변제하고 집도 구입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갈 무렵 시험이 닥쳤다.

“선교회 안에서 갈등이 생기면서 둘로 갈라졌습니다. 저도 그것 때문에 신앙에 시험이 들었죠. 서울에 살기가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고향 옆 해남으로 내려가서 신앙에 매인 것도 벗어나고, 바다낚시나 하며 편하게 살자, 이런 마음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마침 강진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소식이 왔다. 동네에서 제일 못살던 그가 변호사가 되어 내려왔으니, ‘금의환양’이었다. 친구들도 만나고 빳빳한 변호사 명함도 돌리며 자랑도 할 겸 차를 타고 강진으로 향했다. 뒷자리에 앉아 신호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코 옆을 쳐다봤다. 웬 빨간 물체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반대편 쪽으로 쓰러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큰 충격이 느껴졌다.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차가 폐차가 될 정도로 큰 교통사고가 났다. 119 구급차가 신호를 어기고 달려오다가 충돌한 것이었다. 그때 옆을 쳐다보고 미리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거기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사실은 그날 오전에 같이 서울에서 신앙 생활하던 부장판사가 전화를 했어요. 왜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내려갔냐,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해 살자, 그러는데 저는 그 소리가 듣기 싫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오후에 그런 사고가 난 겁니다.”

친구들에게 자랑은커녕 링거를 꼽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만났다. 폐차된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해남으로 넘어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하나님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구나.’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다시 잘해야 할 것 같아.’

▲ 정형근 교수가 울릉도에서 무료로 진행했던 법률상담 현장.

법무부장관상을 받기도

그때부터 시간을 내서 전도와 성경공부에 열심을 냈다. 예수전도단 제자훈련도 받으며 많은 은혜를 받았다. 선교사들이나 어려운 교회들을 위한 후원금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잘되던 법률사무소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을 묵상하면서 고난을 감당했다.

 “그때 학교에서 갑자기 전화가 온 거예요. 교수로 올 생각이 없냐고요. 10년 가까이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교수 자격은 제가 박사학위를 따놓은 게 있어서 됐었죠. 해남에 있을 때 비행기 타고 고생하면서 학위를 땄습니다. 어쩌면 학력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죠. 그런데 그 학위가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겁니다. 교수로 오고 보니 제 달란트에 아주 딱 맞았죠.”

교수 생활하면서 7년 동안 매년 한권 씩 책을 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10년에는 연초에 9편의 논문을 쓰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보통 5년 동안 7편을 요구하는 관습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해 8개의 논문을 쓰고 나니 흥분됐다. 논문이란 테마가 떠올라야 쓰는 것인데 하나님께선 그에게 계속 아이디어를 공급하셨다. 떨리는 마음으로 9번째 논문을 썼는데 계속 탈락됐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정성을 다해서 썼다.

“두 번 반려되는 걸 보고 겸손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썼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법무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 변호사법 개정을 위해 위원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교수님이 이 분야에 연구를 많이 하신 것 같아 부탁한다고요. 그래서 그 논문이 계기가 되어 법무부장관상도 받았습니다. 항상 이랬습니다. 하나님께선 결정적인 순간마다 저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도 나중에 보면 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절망을 먹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숱한 인생의 고비마다 다시 일어나는 ‘부활’을 경험했다. 주검처럼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면 당신도 ‘부활’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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