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에서 나온 좋은 씨앗, 물가에 심겨졌다”

선교 130주년 기획 ②복음화율 1위 전주,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 손동준 기자l승인2015.03.31 15:49:47l수정2015.03.31 16:31l12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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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그때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버림받은 자녀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맨 처음 넓은 바다를 건넜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의 수는 완전수인 일곱으로 그들이 조선에 상륙했을 때 그들의 소망은 밝았었다. 그들은 기도했고 계획했다. 그들의 창고에서 나온 좋은 씨앗들은 물가에 심기어졌다.

-매티 잉골드 테이트(전주예수병원 설립자, 1917년 열린 호남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인 전주는 기독교인 비율이 30퍼센트가 넘어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로 꼽힌다. 전주가 이처럼 높은 복음화율을 기록하기까지는 호남선교를 위해 찾아온 선교사들의 순교를 불사한 헌신이 있었다. 본지는 선교 130주년을 맞아 전주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선교사들의 흔적을 돌아보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의 어려움을 이겨낼 실마리를 찾아봤다.

▲ 7인의 선교사들

호남선교의 문을 연 선교사들

“조선의 호남 지역에는 단 한사람의 선교사도 없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 각지를 돌며 한국 선교사역에 대한 강연을 했다. 마침 미국 테네시 주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의 집회에서 언더우드는 미국 유학생이던 윤치호와 함께 강연을 했고, 이 강연은 호남선교의 씨앗이 됐다.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은 신학생 가운데 한국 선교사를 지망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그 가운데 미국 남장로교회의 테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티, 레이놀즈와 그의 아내 팻시 볼링, 전킨과 그의 아내 메리, 리니 데이비스 등 7명이 있었다. 이 7명은 1892년 센프란시스코를 출발,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향한다. 일행 중 처녀 선교사였던 리니 데이비스는 일본을 거치지 않고 1892년 10월 17일 제물포에 먼저 도착했고, 나머지 6명은 요코하마를 경유한 뒤 같은 해 11월 3일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이 처음 전주를 방문한 건 이듬해인 1893년 9월 무렵이었다. 전킨과 테이트는 전주까지 조랑말을 타고 여행했다. 이들은 당시 한국의 조랑말에 대해 “스코틀랜드의 조랑말보다는 조금 더 크며, 제멋대로의 기질을 갖고, 깡말랐는데, 참을성에 있어서는 이것을 당해낼 것이 없다. 자기 몸무게의 반도 더 나가는 것을 싣고 하루에 35마일씩 일주일 내내 걸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호남선교의 큰 거점이 될 전주를 아름다운 성곽 도시라고 생각했다. 1919년 미국 남장로교 출판위원회에 의해 간행된 ‘한국에서의 나날’의 저자 애너벨 선교사는 “전주는 예전에 왕족의 일가가 살았던 고을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매우 보수적인 곳으로 역사가 오랜 귀족적 생활규범을 가지고 있다. 전킨과 테이트가 이 도시를 둘러보러 다닐 때 조그마한 소년들이 그들을 따라 다니고 야유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애너벨 선교사의 언급처럼 당시 조선인들은 낯선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높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는 이제 왜 외국인 선교사들이 동물원에 가기 싫어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 뚫어져라 넋을 잃고 쳐다보면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관람객들 앞에서 원숭이가 어떻게 느낄 것인지 아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중략) 나는 이러한 사실이 왜 조선의 선교현장에서 많은 신경쇠약자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호남 첫번째 장로교회인 서문교회

선교 거점이 된 서문교회

7인의 선교사들이 도착한 무렵은 동학농민운동으로 민심이 흉흉해 언제 어디서에서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먼저 한국인 조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던 정해원을 선발해 전주로 보낸다. 전주에 도착한 정해원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러 온 사람인 것을 밝히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병행했다. 주일이 되면 자신의 집에서 그간 사귀어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를 드렸다. 1893년 정해원 조사가 도착한 뒤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전주교회(현 서문교회)의 시작이자, 호남 선교역사의 시작이었다. 그 후 1897년 7월 레이놀즈 선교사가 전주로 내려와서 전도를 시작했고, 훗날 제주선교사가 되는 김창국 등 6명의 남녀가 세례를 받게 된다. 이로써 전주교회는 한국인 세례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이 되고, 그해 8월 1일에는 레이놀즈 목사의 집례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이 거행된다.

1897년, 선교사들이 세운 전주 선교부가 많이 성장해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 집회에서는 당시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한국말에 유창했던 레이놀즈가 설교자로 나섰다. 그는 유식한 말로 설교를 했고, 예배 이후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스스로 예배당 개수를 위한 특별 헌금을 작정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예배당이 수리를 마친 9월 19일에는 더 넓어진 예배당에 여자를 제외한 남자가 20명가량 출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교회(현 서문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 전위렴 선교사와 주일학교 아이들

서문교회 역사자료실의 최창선 장로는 “서문교회 100년사가 나온 지도 벌써 23년이 지났다. 지난 120여년의 시간동안 서문교회는 호남지역 기독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며 “처음 왔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4대까지 담임목사를 맡았고, 이들이 사방으로 나가 전도를 하고, 병원과 학교를 지었다. 교회를 통해 세운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 등은 전주에 기독교 문화가 꽃 피울 수 있었던 근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2007년 교회 설립 114주년 당시 기록을 보면 서문교회는 성도 2천여명에 후원 선교사 22명, 미자립교회 17곳, 기관 후원 22개, 일반 후원단체 12개 등을 후원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2003년 시작된 교회 분쟁이 10년 가까이 지속됐고, 현재까지도 담임목사가 공석인 상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사진제공:전주예수병원

선교하는 공동체 전주 예수병원

기자가 찾아간 날도 예수병원에서는 전 직원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병원 내에 마련된 270석의 예배당은 이미 꽉 차서 선채로 예배를 드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병원이 설립된 지 올해로 117년이 지났지만 ‘예수병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병원은 ‘복음전파’의 정신을 고수해오고 있다.

지금이야 대학병원들이나 대형병원들이 적극적인 투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2-30년 전만해도 예수병원은 최신식 의료기기와 미국인 의사가 있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으로 손꼽혔다.

과거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예수병원은 선교병원으로서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매월 1차례 의료봉사는 물론이고 매년 10차례에 이르는 해외 의료선교를 진행하고 있다. 몽골과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의료진들에게 무료로 의학 연수를 시켜주는가 하면, 전 직원이 매월 월급의 1퍼센트를 선교비로 헌금하고 있다.

목회자들에게는 반값에, 선교사들에게는 전액 무료로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이들에 대한 진료비와 수술비 할인 혜택도 제공한다. 이렇다보니 매년 5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의료 혜택을 받고 있고, 목회자와 사모, 선교사들이 연중 15명 정도는 늘 입원해 있다.

예수병원의 김선중 원목은 예수병원에 대해 “교회가 아니면서도 교회다운 모습이 있는 선교적 공동체”라며 “사람이 아닌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병원”이라고 설명했다.

▲ 사진제공:전주예수병원

김 목사의 설명처럼 전주예수병원은 1898년 미국에서 온 선교사이자 의사인 마티 잉골드에 의해 시작된 선교적 병원이다. 잉골드 여사는 전주 성문 밖에 작은 집 한 채를 구입해 어린이와 여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1884년)에 이어 국내 두 번째이자, 호남지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국 남장로교 여전도 회원들이 생일을 맞아 드린 감사헌금을 종자돈으로 병원이 설립됐다는 사실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현재의 예수병원 건너편 언덕에는 선교사들의 묘지가 조성돼있다. 이곳에는 전킨 선교사와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 예수병원 설립자인 잉골드 여사의 자녀 등 15명이 묻혀 있다. 묘지 아래편에는 예수병원 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예수병원과 호남 지역 기독교 전파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신흥학교 옛 예배실

호남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신흥학교

서문교회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을 건너면 바로 신흥학교가 보인다.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가 세운 이 학교는 한국에 상륙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끼친 수많은 영향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로 꼽힌다. 처음엔 ‘예수교학교’였던 것이 ‘새로운 여명’을 뜻하는 ‘신흥학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 1906년. 이후 학교는 1919년 전주 남문 밖 시장부근에서 3.1운동을 주도했고, 1937년에는 폐교를 무릅쓰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고 나섰다.

▲ 신흥학교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기념비

신흥중학교의 서주형 교장은 신흥학교에 대해 “나라와 민족의 역사적 현장 한가운데 서 있던 학교”라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제시대 당시에도 일주일에 성경을 3시간씩 가르쳤다는 것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사립학교법에 의해 종교교육이 어려워진 지금도 일주일에 1시간 성경교육과 수요일에 열리는 채플, 매일 업무를 시작하기 전 드리는 교사 예배로 학교의 설립정신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 교장은 학교에서 부흥회를 하고 부활절이면 계란 굽기 대회를 하는 등 기독교 색체가 강한 행사를 하는 것은 “사실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모든 일이 가능 했던 것은 학교가 오랜 세월동안 지역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이라며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서 교장은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문을 닫아버렸듯이, 신앙인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전 교직원들이 노력하고 있다”며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학교를 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정면으로는 서문교회가, 뒤편으로는 예수병원이 보인다. 전주가 왜 전국에서 가장 높은 복음화율을 자랑할 수 있었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시민들의 마음속에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할 수 있도록 교회와 병원, 학교가 좋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 아닐까. 선교사들의 지혜가 새삼 감탄을 자아낸다.

부활의 신앙으로 다시 부흥을!

▲ 박진구 목사


-전기연 박진구 회장 인터뷰

전주시기독교연합(회장:박진구 목사, 전기연)은 올해 부활절 예배 주제를 ‘부활의 신앙을 다시 찾자’로 정했다. 전기연의 박진구 회장(전주안디옥교회)은 “전주 교회도 조금 늦게 왔을 뿐 한국교회 전체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며 “늦게 왔다는 것은 다른 곳보다 침체가 더 오래 갈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 이라며 “과거 미국과 유럽교회처럼 되지 않으려면 부활의 신앙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주 시내 한가운데 지상 5층 규모의 신천지 센터가 들어서는 등 박 목사는 “전주는 타 지역에 비해 이단의 활동도 매우 활발하다”고 전했다. 그는 전주시민들에 대해 “종교성이 깊다보니 신천지를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이는 신앙의 기본이 약하고 기독교 문화에 의해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성도들에게 말씀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며 “순수함으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박 목사는 “전주교회는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호남 기독교의 중심” 이라며 “한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세우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교회가 하나 되고 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손동준 기자  djson@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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