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제네바교회 예배를 위하여 ‘기도서’ 만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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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제네바교회 예배를 위하여 ‘기도서’ 만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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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2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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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누스의 지칠 줄 모르는 사역수행
▲ 조병하 교수

테오도를 베자는 ‘칼비누스의 생애’를 처음에 프랑스어로 썼고, 곧 이어 자신이 라틴어로 번역했다. 책 내용의 큰 골격은 거의 그대로 유지됐으나 그는 보다 간결하게 번역하고 있다. 프랑스어 글이 보다 분량이 많다. 또한 이 글은 일찍부터 칼비누스의 전집에 포함됐다.

베자에 따르면, 1536년 바젤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기독교강요)’ 초판으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지도자가 됐던 칼비누스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동안인 1539년 개정판을 냈다. 1541년 9월 13일부터 제네바교회를 다시 맡게 된 후 1543년 다시 한 번 증보했고 최종판은 1559년에 출판됐다.

칼비누스는 1543년 제네바교회 예배를 위하여 ‘기도서’를 만들었고, 병문안 시에 사용할 ‘권고문’과 ‘성례와 결혼식 예식서’를 썼는데 여기에서 공적 예배에서 사용하는 찬송가에 대하여서도 논했다. 그 밖에 같은 해 집필했던 글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다. 또한 1548년에는 디모데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의 주석들을 썼다.

개혁과정에서 칼비누스를 도와 사태를 바로잡아야할 시지도자들의 악행이나 이중적 태도로 인해 1547년 12월 16일에 모인 회의에서 폭동으로 변할 위기에 몰린 상황을 듣고 그는 급히 참석해 중재해야했고 이로 인해 몇 해 동안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다. 이를 주도했던 제네바시의 행정장관이었던 아미 빼랭은 여러 해 종교법원의 권한을 폐하려 시도했고, 1555년 그와 폭력사용을 계획했던 대원들이 시행직전 술좌석에서 부주의로 이를 폭로함으로 도주해야 했다.

한편 그의 개혁에 대하여 듣고 수많은 나라들에서 각개 각층의 사람들이 배우려고 몰려들었다. 그래서 강의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스페인어로도 행했다. 1549년 초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칼비누스의 설교를 기록 출판하기 위해 적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기록자를 고용해 이 후로 행한 칼비누스의 설교는 모두 기록해 출판했다. 이때 아울러 그의 강의도 속기하여 출판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다른 속기사들을 고용해 강의도 출판했다.

1551년 파리에 있는 카르멜수도회의 수도사였던 제롬 볼섹이 제네바에 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대한 가르침을 비난했다. 교회목사들은 그를 초청하여 5월 15일 장시간 토론했다. 일시적으로 그는 잠잠했으나 10월 16일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그는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전파할 기회라 생각했고, ‘하나님을 폭군’ 또는 ‘하늘의 유피테르’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칼비누스가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설이 막 시작됐을 때 칼비누스은 그곳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강연을 마칠 때까지 참고 있다가 한 시간 정도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칼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의 많은 문장을 인용해서 반박했고, 베자는 그러한 그가 마치 ‘바로 그날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을 읽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볼섹의 문제로 성도들은 1551년 12월 18일에 있었던 성경공부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다루어 달라고 결의했고, 칼비누스와 제네바 근교 목사들이 모여 ‘신앙의 항목’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로 각 목사들과 믿음 좋고 학식 있는 6-7명의 성도들이 소신들을 밝혔다. 그리고 이 모임의 회의록이 출판됐고, 1552년 초 칼비누스의 ‘예정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가 출판됐다.

1556년 8월 26일에는 칼비누스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개혁파 교회의 문제를 수습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칼비누스는 치질과 궤양, 학질의 질병과 싸워야 했다. 1558년 말 칼비누스는 다시 열병으로 8개월 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야했다. 그러나 칼비누스가 병에서 호전되어 직무를 재개했다. 1562년 이 후 칼비누스는 건강을 잃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그는 꾸준히 자신의 일을 감당했다. 1564년 4월 25일 공증인 삐에르 체네라트에 의해 짤막한 유서 작성하여 서명했다. 그리고 그는 1564년 5월 27일 죽어 다음날(월) 안장됐다.

그는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순수한 교리를 방어했다. 그것을 위해 문제의 뿌리를 꿰뚫어 보았고, 가장 적은 수의 말로 답변해 내는 놀라운 기술인 이었다. 그는 겸손하게 그의 동역자들과 사역에 대해 함께 논의 했고, 검소한 생활과 자발적으로 보다 친구들의 권유로 원반이나 열쇠던지기나 정부에서 금하지 않은 합법적인 놀이를 통하여 긴장을 풀었다. 부인과 사별(1549년 3월) 후 16년간 독신의 삶을 살며 매우 학구적이고 깊은 신앙의 글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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