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에 대한 신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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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에 대한 신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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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2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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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돈 교수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내가 교수로 있는 학교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이다. 실천신학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학교 이름에 붙인 예가 아마 없을 것이다. 전에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께 학교에 임용되었다고 하니 이름이 좋다며, 조직신학대학원대학교는 할 수 없는데, 역시 실천신학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 이름에 '실천'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으니 초창기에는 원우들이 상당히 실용적인 부분을 요구했다. 목회자들이 모이는 학교이다 보니 오늘 배운 것을 그 돌아오는 주일에 써먹을 수 있기를 원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공부를 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쓸 수 있는 매뉴얼을 요구한 것이다.

실천신학은 그 특성상 실용적인 부분이 많다. 물론 그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Praxis)에 대한 신학이라는 것이다. 신학이 되어있지 않고 실용매뉴얼만 가지고 하는 목회는 결국 목회의 기술자만 양성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갈 길을 잃은 목회자와 성도들만 만들어 낼 뿐이다.

지금이야 학교에 대해서 원우들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오니까 이런 질문이 사라졌지만, 초창기에는 이런 질문이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그럴 때 마다 내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드라마를 봐도 배우가 연기를 잘 하는지, 못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모두가 대본에 나온 대로 잘 따라하고, 대사도 유창하게 하지만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 그들은 대사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드라마를 이해하고, 작가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 배역 안에 들어가서 그를 이해하고, 스스로가 그 배역이 된다. 그래야 연기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주워들은 이야기, 남들이 만들어준 프로그램, 남들이 경험한 스토리를 가지고 설교하고 목회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인다. 그런데 교인들도 안다. 목사가 생각이 있는지, 자신이 먼저 이해하고 감동했는지 그들은 살피는 것이다.

목회는 신학의 표현이다. 목사가 가지고 있는 교회론과 목회신학이 바탕이 되어 그것이 표출되는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에서, 교회의 프로그램에서, 특히 목사의 삶에서 그것을 은연중 느끼게 된다. 딱히 그것이 무엇이라고 알 수 없을지 몰라도, 목사에게 깊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가끔 목회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 '목회하는데 신학은 아무 쓸모 없어' 아마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들이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만 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학을 위한 신학은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위한 신학함이라면 꼭 필요하다. 길어먹을 우물이 없다면 그 샘은 곧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전에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목사가 목회세미나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세미나에 갔다 올 때마다 감동이 되어 교회에서는 세미나 후에 항상 새로운 프로그램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목사가 또 세미나에 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안수집사가 장로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이 또 세미나에 가신다는데 우리 말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안수집사는 다급한 마음으로 장로님의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장로님은 태평이다. '냅 둬. 또 몇 달 하다 말겠지'

신학이 없으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남들 잘 됐다는 프로그램만 가져다 써 보고, 교인들은 탈진하고 만다. 교인 모으는 기술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는 목회자가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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