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준비의 길, 소통해야 고통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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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준비의 길, 소통해야 고통 없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5.03.2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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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당국간 교류협력 최악...5.24조치와 북핵문제 변화 모색해야

통일부가 최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 남북한 교역액은 총 23억 4천만 달러에 달했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반출 금액은 전년도보다 114%가 늘어난 11억 3천 638만 달러, 반입 금액도 96% 증가한 12억 674만 달러나 됐다.

남북 교역 누적액은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89년 이래 처음으로 200억 달러를 돌파한 217억 8천934만 달러였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거듭했던 근래 몇 년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결과로 보일 수 있다. 한 때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되면서 2013년 교역액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상승률이 높게 보일 수 있지만, 2005년부터 연간 교역액이 10억 달러를 넘으면서 꾸준히 가파른 상승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역 건수로만 봐도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전체 25,268건이었던 것이, 2000년대 꾸준히 증가해 2007년에만 25,027건이나 이뤄졌다. 2008년부터는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됐던 2013년 2만 여건 외에는 매해 꾸준히 3만 건 이상의 교역이 이뤄졌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남북한이 2015년 한반도 화해의 전기를 마련하는 것일까?

냉정하게 말해  남북한 교류 협력이 전체적으로 활발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2008년부터 이어져온 남북한 경색국면의 여파로 인적 교류, 관광산업 등을 비롯한 3통 교류(통신, 통관, 통행) 등이 크게 줄었든 것이 주 요인이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통일의 기틀은 먼 나라 얘기가 될 뿐이다.

▲ 사진은 지난 2010년 '민족의화해와평화를위한종교인모임'이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당국 간 교류협력은 지금까지 답보 상태를 거듭하고 있다.

남북 당국 간 교류협력의 역사

독일 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은 냉전체제 아래 불신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에야 당국간 교류협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남북한도 1960년대까지는 교류협력에 대한 논의를 거의 하지 못했다. 기점은 1971년 8월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가 남북적십자 회담을 처음 제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수차례 회담 끝에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를 만들고 경제인과 물자 교류를 제의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 교류가 이어진 것은 한참 후였다. 먼저는 북한이 1983년 수재를 입은 남한에 물자를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84년 11월부터 약 1년간 남북경제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남북 교류협력이 제도적 틀이 마련된 것은 시간이 더 흘러 1980년대 후반이었다.

동구권 붕괴의 여파로 남한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 바 ‘7.7선언’을 발표하고, 후속조치로 남북한 간 교역을 허용하는 ‘대북경제개방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1989년 6월에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지침’,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남북협력기금법’ 등이 마련됐다.

또한 1991년 1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1994년 11월 1차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도 나왔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1995년 고난의 행군기를 겪고 있던 북한에 15만톤의 식량을 지원하게 된다.

1998년에는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떼를 이끌고 방북했고, 같은 해 11월 18일 비로소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2000년, 남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퍼주기 논란’이 있기는 했었지만, 2000년 이후에는 남북한 당국 간 교류협력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10월에는 최초의 대북 식량차관으로 쌀 30만톤과 옥수수 20만톤을 보냈고, 경의선, 동해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착공식이 거행됐다.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으로 전 세계의 관심이 큰 개성공단도 2003년 6월 착공식을 갖고 2004년 6월 시범단지가 준공됐다.

이어 2007년에는 남북 열차 시범운행이 실시된 후 다시 한 번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남북한 당국의 관계는 악화돼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경색국면이 깊은 만큼 다각적 교류협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 이어지고 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사건, 북한의 핵실험 강행, 천안함 침몰과 남한의 5.24조치 발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남북한 관계에 재를 뿌리는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더구나 2013년에는 개성공단 마저 잠정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같은 해 9월 16일 남북한이 재가동에 합의했지만, 금년 3월에는 다시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여부를 두고 남북한의 팽팽한 신경전이 일어나고 있다.

“대북지원 20년 역사 상 최악의 해”

동서독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분단 중에도 끊임없이 교류하고 소통해온 점이 가장 큰 요인의 하나다. 1975년부터 통일 직전인 1988년 까지 연평균 무역거래는 52억 달러, 용역거래는 16억 달러에 달했다.

상호 교류는 동서독 간 적대감을 완화시키고 교통과 통신, 인적왕래는 분단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동독 주민들의 생활 개선과 서독에 대한 호감 유발 등의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 당국 차원에서 추진됐던 이산가족 상보 도표. 2008년 이후 그래프가 지금의 남북 교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통일부

반면 지금의 남북 당국 간 교류협력은 통일을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다. 이산가족상봉의 경우도 2008년 이후에는 2009년과 2010년, 2014년뿐이었다. 이산가족 생사확인도 비슷한 기간 9백여건에 그쳤다.

매년 이산가족 사망자가 3천8백명에 달하고, 올해는 이산가족 사망자가 생존자보다 많을 전망이어서 안타까움이 크다.

대북 인도적 지원의 경우도 남북 경색국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국 차원에서 진행한 대북 지원이 2006년 2000억원, 2007년 1432억원 규모이었던 것이 2008년 이후에는 2010년  183억원만 지원됐을 뿐이다.

역대 당국 차원의 대북지원이 1조 1249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지난 8년간의 대북 지원이 얼마나 적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영향으로 민간단체 인도적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지난 1월 59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는 ‘20년 대북지원 역사상 최악의 해’였다고 평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강영식 사무총장은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은 가운데 민간단체의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면서도 “통일을 준비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교류협력을 빼놓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남북 당국 간 경제협력 사업 중 임진강 수해방지사업, 경의선 동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사업, 농업협력사업, 경공업 원자재 제공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사업 등 많은 것들이 답보 상태이다. 

남한이 2010년 취한 5.24조치는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전면 불허’, ‘남북교역 중단’,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 ‘북한에 대한 신규투자 불허’(개성공단 제외), ‘인도적 대북 지원사업 원칙적 보류’ 등을 포함하지만, 앞서 살펴본 전체 교역액만 봐도 실제적 효과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어설픈 대북정책이 새로운 방향 모색을 저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북 교류협력을 막는 근본적인 또 다른 이유는 북한의 핵실험 강행이다. 우리 정부의 대북기조라 할 수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핵문제와 경제협력을 하나로 묶고 있고,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북한 당국이 한반도 안정을 해치는 핵을 고집하는 한 한반도 평화는 없다. 결과적으로 더욱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가 반드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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