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과 제국의 정치세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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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과 제국의 정치세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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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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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들에게 의무부과 후 개혁 완성되고 교회권력 시작
▲ 조병하 교수

신성로마제국이었던 독일제국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사건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됐다. 1526년 제국 내에서 농민봉기의 진압 이후 새로운 정치적 긴장이 발생했다. 북부독일지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동맹(데싸우동맹)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맹(토르가우동맹) 서로 맞섰다. 제국의 황제 칼5세의 갈등극복의 시도는 실패했고, 1526년 첫 번째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교회와 관련된 문제들을 다음 공의회까지 미루어지게 됐다.

1525년 7월 가톨릭영주(공작) 작센의 게오르그, 마인쯔의 알브레히트, 브란덴부르크의 요하킴 1세, 브라운슈바이크의 에리히와 하인리히가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무력으로 섬멸하기 위하여 데싸우동맹을 결성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위협하는 가톨릭의 반응에 대항하여 젊은 백작 헷센의 필립이 작센의 선제후 요한네스와 함께 고타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을 1526년 2월 토르가우에서 승인하였기 때문에 토르가우동맹이라고 칭한다. 뒤이어서 북부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봉건군주들이 이 동맹에 가입했다. 그리고 1526년 우선 선제후령 작센과 또한 헷센으로부터 독일 루터교 지역교회들이 시작됐다. 루터는 교회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제후들이 그렇게 하도록 의무를 부과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전 세기에 시작했던 개혁이 완성됐고 그와 더불어 군주의 교회권력이 시작됐다.

1526년부터 1530년까지 선제후령 작센의 지역교회는 지방제후의 검열(쯔비카우의 설교자 니콜라우스 하우스만의 생각)에 의해 조직됐다. 이와 같은 노력은 1526년 1월에 있었던 슈파이어제국의회 이전부터 시작됐다. 검열을 통해 1526년 루터의 “독일 예배”, 1527년 멜란히톤의 라틴어 검열항목, 1528년의 멜란히톤의 독일 “검열관의 가르침”, 1529년 루터의 교리문답서들(포스터 형태의 소교리문답, 그리고 대교리문잡, 최종적으로 책의 형태로 소교리문답), “결혼의식서”와 1523년 “세례의식서”의 개정판이 출판됐다.

1529년 슈파이어제국의회와 마르부르크신앙담화가 열릴 때쯤에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정치적인 입지가 다시 악화됐다. 교황과의 정치협상을 벌려왔던 황제는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곤고히 세울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페르디난드의 지도하에 뭉쳤던 가톨릭교회 지지세력들은 1529년 제2차 슈파이어제국의회에서 프로테스탄트신자들에게 강력 대항했으며 보름스칙령을 더욱 강화하였다. 제국의회에서 단지 이러한 조치에 소수의 프로테스탄트신자들 만이 참석하여 엄숙하게 항의했고, 이에 대해 “항의하는 이들”, 즉 프로테스탄트”인들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529년 4월 19일의 항의에는 6명의 제후들과 14개의 북부독일의 도시들만 참석했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독일과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결속이 필요했고, 1529년 10월에 마르부르크신앙담화를 개최하게 됐다. 루터파 쪽의 온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교회들 간의 대립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 회의의 주요참석자들은 루터, 멜란히톤, 요나스, 브렌쯔, 오시안더, 쯔빙글리, 외콜람파드, 부쩌, 헤디오 등 이었다. 논의 된 15개의 마르부르크 신앙항목들 중에서 그리스도이해에 얼마간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포함한 14개 논제에서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성만찬에 관한 논제를 다루었던 15번째 항목에서 루터는 스위스뿐만 아니라 스트라스부르의 입장도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 칼 5세는 1530년 여름에 소집됐던 아욱스부르크제국의회에 참석을 위해 독일에 왔다. 칼은 종교문제가 우호적인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기대했던 것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황제는 멜란히톤을 통해서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을 제출하게 했고 후에 이에 대한 가톨릭신학자들(에크, 파베르, 코흐러위스 등)에 의해 반박문을 내게 했다. 그리고 황제 자신도 이에 근거하여 아욱스부르크신앙고백을 반박했다.

황제의 적대적인 계획들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제후들은 1531년 2월에 슈말칼덴동맹을 결성하게 됐다. 그것은 제국의회의 결의의 시행을 막기 위한 전쟁을 각오한 동맹이었다. 슈말칼덴동맹과 오스만 투르크족의 위협이 황제로 관여하게 하였다. 1532년 뉴른베르크 휴전은 이어서 1년 내에 모이게 될 공의회 때까지 이제까지와 같이 관용이 지속됐다. 그리고 이 후에 몇 년 동안 슈말칼덴동맹의 전성기를 맞았다.

프로테스탄트운동은 1534년에는 뷔르템베르크와 폼메른 지역에, 그리고 1539년에는 공작령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에서 강력한 루터파 교회가 확장되어 나갔다. 황제가 1532년 이후 10년 동안을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족의 싸움에 말려들었었기 때문에 더욱 이 일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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