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은 적합하고, 매우 고상한 일이라고 가르친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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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은 적합하고, 매우 고상한 일이라고 가르친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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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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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실천목회개혁
▲ 조병하 교수

루터는 요한네스 엑크와의 라이프찌히논쟁(1519년 6월 27일–7월 16일)에서 하나님이 임명한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무오성에 도전하였다. 그는 단지 고대교회의 첫 4회의 전그리스도교교회회의(공의회)들만을 ‘성서를 고수했고, 복음을 이단에 대항하여 확고히 방어했고, 성서를 적절히 해석’했던 회의였다고 주장했다.(325년 니카이아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 431년 에베소회의, 451년 칼케돈회의)

라이프찌히논쟁 직전에 루터는 학생들에게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씀들의 가르침이고 가장 순수한 신학이다.” 루터는 성경해석방법으로 사중의 구별법을 사용했다. 즉, 역사적 해석, 풍유적(알레고리적) 해석, 유형론적 해석(도덕적인), 아나고기적 해석(유추의, 최후의 심판을 목적하는)을 사용했다. 물론 루터의 성경해석은 그의 교회론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그에게 교회는 하나님과 악마가 싸우는 장이다. 보이는 교회는 전혀 순수하거나 순결하지 않다. 교회는 언제나 성도들과 위선자들로 구성된 “혼합된 몸”이다. 교회 내의 “작은 무리”(소수) 만이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수도원의 삶의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적합하고, 결혼은 진부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간으로서 충분하고 결코 성적상태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결혼생활은 모든 이에게 적합하고, 매우 고상한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1520년부터 1525년 사이에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와 가정의 행복을 단념했던 수도사들과 수녀들에게 결혼생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결혼을 비방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자는 이 세상의 신인 악마라고 역설하고 악마의 도덕을 ‘도적하고 저항하기 위하여’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루터 자신은 1525년 6월 13일 저녁 수도원에서 요한네스 부겐하겐 목사의 주례로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루터는 동정과 독신을 미화하는 대신에 결혼과 가정이 완전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자들은 ‘지출과 절약’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여자가 없으면 세상은 허물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여자가 남자보다 덜 “지성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여자가 정치나 교회기관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 소속의 검은색 수도원 건물을 인수하여 자신의 가족을 부양했다. 선제후가 루터에게 1524년부터 연봉 100굴덴, 1525-32까지 200굴덴, 300굴덴, 그리고 1540년부터는 400굴덴을 주었다. 루터는 자신의 저작으로부터 어떤 이익도 챙기지 않았고, 400굴덴은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들 중 최고의 액수였다. 루터의 큰 집의 유지와 찾아오는 도망친 수도사들과 수녀들을 돌보는 일과 끊임없는 방문객을 위하여 연 500굴덴이 필요했다. 차액은 부인이 잡다한 일을 하여 보탰다.

루터는 정치적인 이유로 1539년 12월 10일 독일제국의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방어동맹과 슈말칼덴동맹의 한 사람이고 중요한 인물이었던 백작인 헷센의 필립에게 중혼을 허용함으로 종교개혁의 오점을 남겼다. 난잡한 생활을 했던 필립에게 그의 누나는 “많은 매춘부 보다 한명의 첩”을 권면했고, 필립은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루터는 신뢰가 깨졌거나 배우자가 악의가 있게 도망쳤다면 결혼의 삶은 파괴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혼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필립에 대하여 1540년 4월 10일 루터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중혼을 허용한 일에 대하여 “그것이 비밀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필립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 루터의 묵인을 공개적으로 활용했다.

루터는 1539년 12월 10일 “흑암의 날”에 교황주의자들, 농민들,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루터에게 1520년 이미 교황권에 대한 반발이 공식화됐고, 1525년 5월에는 “다른 농부들, 강도적이고 살인적인 폭도들에 반대하여”라는 글을 써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 대하여 반박했다.

유대인들에 관해서 루터는 오랜 비판과 조치들을 취했다. 1536년 8월 요한네스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선제후령 내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돼야 할 것을 공포했다. 루터는 1543년 1월에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 유대인들을 반박했다. 1546년 2월 15일 임종 하루 전 아이스레벤에서 행한 그의 마지막 설교 “유대인들에 대한 권고”에서 유대인들이 개종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개종의 여지를 남겨두는 관용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루터에게서 발견되는 반유대주의는 근대 독일의 반셈족주의의 볼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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