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중세와 근대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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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중세와 근대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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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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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휴머니즘
▲ 조병하 교수

르네상스라는 말은 (라틴어) 성서의 개념들로부터 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위한 공동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르네상스는 문예부흥운동으로 일컬어진다. 1300년부터 1500년 사이에 전통에 대한 다양한 파괴가 일어났고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과학의 혁명을 일으켰던 중세와 근대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4세기에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divina commedia)에서 시작됐다. 그의 ‘신곡’은 1307년부터 1320년까지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틀 속에서 집필했다. 이 글 속에 베르길리우스의 글들 활용 속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이미 고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화가요 르네상스 길의 개척자였던 조토 디 본도네(1266-1337) 역시 그의 그림 “최후의 심판”에서 보이듯이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르네상스의 완숙한 모습은 성직자요 시인이었던 프란체스코 페트라카(1304-1374)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고전미에 대한 찬사, 고전문학들의 수집과 연구 등에 심취했다. 또한 플로렌스의 인문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이었던 지오반니 보카치오(1313-1375)는 100개의 단편소설들을 모아놓은 ‘데카메론’을 집필(1349-53)하여 본의 아니게 교회와 대립하게 됐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맞은 때는 15세기였고, 플로렌스가 중심에 있었다. 그리스의 고전이 플라톤연구를 통해 풍부하게 소개됐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도 확산됐다. 그런데 프랑스, 영국, 스페인과 같은 다른 지역보다 독일에서 독자적인 색체를 갖고 더욱 발전했다. 독일의 인문주의는 이탈리아에서와 달리 독자적이고 매우 포괄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교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더욱 호의적이었다. 교회 역시 이러한 인문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급진적인 견해들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일부 시인들에 그쳤고, 대부분의 교수들과 성직자들, 수도사들 중에 인문주의 학자들은 교회문제들에 온건한 태도들을 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상태개선에 힘썼다.
독일의 인문주의는 14세기부터 시작됐다. 이미 황제 칼 4세(1347-1378)는 프렌체스코 페트라카와 교제가 있었다. 독일에서 인문주의는 1470년경 이래로 처음에는, 라틴어 학교에서(하이델베르크의 루돌프 아그리콜라, 슐렛트스타트의 야콥 빔펠링, 그리고 슐렛트스타트의 학교들은 인문주의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다음으로, 15세기 말부터 비엔나와 에르푸르트대학들에서 자리 잡았다. 에르푸르트대학에서의 전성기는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종교개혁을 주관했던 초기인 1517-1521년에 인문주의 전성기를 이뤘다.

당시 독일의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은 요한네스 로이클린(1455-1522)과 로테르다무스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였다. 이들은 외형적인 교육을 교회봉사를 위해 행했고, 중세 수도사들의 라틴어를 고전적인 라틴어로 대체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신학의 현대화에 르레상스의 새로운 신앙심 유형으로 영향을 끼치려고 힘썼다.

로이클린은 남부독일 폴쯔하임에서 태어나 독일과 프랑스 대학을 오가며 공부했고, 당시 독일의 가장 유명한 헬라어와 히브리어 학자였다. 1506년에 발행한 그의 저서 ‘히브리어 기초에 대한 세권의 책’은 독일에서 가장 유용한 히브리어 언어교재였고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쾰른의 도미니쿠스파 수도사의 친구였던 한 세례 받은 유대인이 황제의 위탁으로 랍비문서들을 없애려고 시도할 때 로이클린은 유대문서의 보존을 위해 싸웠고, 결과로 1520년 교황의 소교서로 유죄로 판결됐으나 젊은 인문주의자들의 “익명의 사람들의 편지들”의 도움과 함께 도덕적인 승리를 이룰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다무스의 고우다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데벤테르의 유명한 라틴어학교에서 공부했고, 13세가 되기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서 지냈고, 후에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1506-1509 이탈리아에서, 1509-1514 영국에서, 1515-1521 네덜란드에서 지내다가 1521년부터 바젤에 자리 잡았다. 1502년 교육받은 자들을 위한 경건서적 ‘그리스도교 군사의 신앙편람’, 헬라어로부터의 자신의 라틴어번역과 간결한 주해를 단 1516년 신약성경 비평 판 ‘새로운 모든 증거(신약성경)’ 초판을 발행했고, 마르틴 루터는 1519년의 두 번째 판을 사용했다. 1516년, 1523년 이 후에 교부들의 글들을 출판했고, 1526년에 출판된 이레나이우스의 글들은 루터의 성만찬론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는 거친 풍자적 조롱을 통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로이클린의 논쟁에 말려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루터와도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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