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한반도 선교의 ‘문’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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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한반도 선교의 ‘문’ 열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5.02.2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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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선교 130주년 특별기획 - 부흥의 현장을 가다 ⓛ인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된 첫 관문, ‘인천’

“주님, 우리는 부활주일 한국 땅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한국 백성을 얽매이고 있는 죄악의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첫 기도문 中에서

올해는 아펜젤러·아펜젤러·스크랜턴 선교사의 한국 방문을 기점으로 선교 130주년, 민족사적으로는 해방 7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다. 지금은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이뤘지만, 130년 전만해도 한국은 동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로 불리며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러한 낯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수한 열정으로 달려온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록 그 시작은 외세의 강압과 굴욕적인 조약 타결에서 시작됐다고 할지라도, 악마저도 선용(善用)하시는 하나님은 민족 불운의 역사를 희망의 기회로 바꾸셨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복음의 열매를 맺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성장하게 됐다.

특히 제물포(인천)항은 문호가 개방된 이후 선교사들이 첫 발걸음을 내딛은 곳으로 인천 기독교 역사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본지는 선교 130주년을 맞아 지역 부흥의 현장을 소개한다.

#복음의 개항지인 인천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2월 중순께 방문한 인천항의 바다는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고요하고 푸르렀다. 한국 최초 개항지이자 복음을 받아들인 성(聖)스러운 땅의 비밀을 아는 것처럼 인천항의 겨울 바다 물결은 유난히도 맑게 빛나고 있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 긴 항해 끝에 제물포 항에 첫 걸음을 내딛었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바라본 풍경도 이러했을까.

▲ 저녁 노을이 내려앉은 인천 항구의 풍경.

한국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는 과정에서 인천항(구 제물포항)은 개항과 동시에 복음이 흘러오는 첫 관문 역할을 했다. 1880년대 조선은 열강의 제국주의 도전 앞에 굴욕적인 문호 개방을 하게 됐지만 하나님은 이마저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제물포항은 당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도 서울에 가장 가깝고 중부에 광대한 상권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입지적 조건에 유리해 원산항과 함께 개항장으로 선택됐으며 대부분의 나라와 통상조약이 이뤄졌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천항을 통해 선교의 개척자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게 됐다.

공식적으로는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스크랜턴이 인천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한국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됐다. ‘배재70년사’에 의하면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머물던 7월 19일에 한 모임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감리교회의 시작이 되었으며, 인천 최초의 교회인 제물포교회(현 인천 내리교회)의 설립 역시 이러한 시기에 진행됐다고 한다.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된 전도의 물결

인천은 1887년에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에 파송한 노병일에 의해 전도 활동이 개시되었으며 제물포 선교의 첫 열매로 세워진 내리교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강화 그리고 인천해 앞에 산재한 무수한 섬들, 경기도까지... 경계를 뛰어넘는 복음 전파로 황해도 남부, 충청도 북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선교기지가 마련됐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복음의 전파를 위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선 민중들이 현대적인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점에서 많은 선교학자들은 인천 개항은 침략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세워진 인천 내리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국내에 거주하는 서양인에게 보여준 교회이기도 했다. 그 후 내리교회는 눈부신 부흥을 이룩했다. 1890년에 한국 최초의 자비량 예배당인 회당 여섯 칸을 건축했으며, 1894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예배당을 자력으로 건축했다.

처음으로 인천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자 서울과 대동한 선교를 전개하게 되었다. 특히 아펜젤러를 뒤이어 제2대 담임목사이자 제물포 선교 책임자로 파송된 존스 선교사에 의해 본격화 됐다. 그는 최초로 인천에 상주하는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펜젤러가 인천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존스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

존스 목사는 1893년 강화 교산교회 개척을 필두로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강화 홍의교회, 강화 상도교회, 강화 고비교회, 부평 굴제교회 등을 차례로 개척하여 내리교회는 명실상부 인천 강화 선교의 전초기지가 됐다. 1892년에는 존스 선교사의 부인에 의해 영화학교가 설립됐는데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이 되었다.

박경진 장로(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는 “내리교회는 인천 개항과 함께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아펜젤러 부부가 감격의 찬송을 부르던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며 “선교사 입국 당시에는 그 어떤 가시적 선교의 열매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때 뿌려진 선교의 씨앗이 자라나 몇 년 후 내리교회가 세워진 것”이라고 밝혔다.

▲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진. 1890년대 인천(제물포)항의 모습.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보유)

#한국인에 의한 인천 선교시대 개막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에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큰 부흥을 성취한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전문가들은 가장 큰 요인이 대형 부흥집회운동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애국운동, 105인 사건과 3·1운동은 한국교회 부흥의 정점을 이뤘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대부흥운동이기도 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인 신자들이 모인 합동대사경회에서 회개를 통한 성령의 역사는 전국 곳곳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의 불길은 인천에서도 일어났다.

1907년 3월에 두 한국인 형제가 평양에서부터 인천에 와서 일련의 집회를 인도했는데, 그 때 온 교회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었다.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독립의식의 심각한 좌절감에다 뒤를 이어 전 세계적 경제공황의 엄습, 일제의 탄압과 농어민 수탈 등은 어디를 보아도 소망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1930년, 조선감리교회의 탄생을 전후해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는 1907년 부흥의 불도 꺼진 후였고 사회주의와 세속주의가 교회를 크게 위협하며 일본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던 때여서 교회는 교회대로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굳어져 있었기에, 교회는 어떤 새롭고 강력한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갈망하고 있었다. 인천에서는 1932년 12월 29일부터 1933년 1월 7일까지 인천의 남녀 대사경회에 조신일, 이용도 목사를 청빙해 부흥회를 열었는데, 신령한 은혜를 풍족히 받아 각 처에서 새벽기도회가 열렸으며, 많은 결신자들이 나왔다.

#해방 후 ‘연합회’ 조직으로 본격적 활동에 돌입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 청산을 두고 교단의 분열, 교파간의 대립을 시작했다. 여기에다 6·25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남한에서의 이념 간 분열과 정종유착, 4·19혁명, 5·16군부 쿠테타 등을 통해서도 갈등이 지속됐다. 이러한 진통과 상처를 진정시키고 치유한 것은 대형부흥집회를 통한 은사였다.

인천은 감리교를 중심으로 큰 교세를 형성했으며 다른 교단은 열세를 띄었다.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감리교 교회들만 크게 부흥하고 있어서, 인천의 성결교와 구세군 등 몇몇의 교회는 교세가 미약해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개신교의 연합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복 후에 제일장로교회가 설립됐으며, 성결교회 등 다른 교파의 교회들도 그 교세가 성장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미군의 병참 보급기지화로 인천은 사방에서 모여든 타지 사람들과 1950년 6·25전쟁으로 피난 온 이북 사람들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그 중에는 장로교 신도들이 많았다. 그래서 광복 후에 세워진 인천제일장로교회가 모체가 되어 순식간에 곳곳이 장로교회가 설립 확장 되고 여러 교파의 교회가 세워지게 됐다.

인천 교계는 1950년 후반부터 상호 협력하는 연합선교활동을 해오다가 1960년대에 와서야 연합회를 조직하고 활동에 돌입했다. 6·25전쟁 중에 시급한 것은 이북에서 피난 온 교인들의 구호와 가족, 친인척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피난민의 구호활동을 전개하면서 연합활동의 필요성을 자각한 성도들은 교역자들과 장로들이 중심으로 1952년 4월 ‘이북신도대회 인천지부’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에 협력하는 각 교파간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연합활동으로 발전됐다.

▲ 초기 내리교회 십자가형 성전.

#이제는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인천기독교연합회’ 정기총회는 1962년 3월 31일 율목감리교회당에서 50여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1970년대에 진입하면서 대형 연합집회가 정착되었으며, 이는 인천 전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인천기독교연합회는 3·1절 기념예배, 인천선교의 날 기념예배, 부활절 연합예배, 6·25 각성 연합행사, 8·15 광복 기념예배, 성탄절 기념 예배를 드렸으며 △77민족복음화 대성회 △80,88,90세계복음화선교대회 △인천선교 백주년 기념사업 △지역사회 인사와의 협력사업 △나라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등을 주요사업으로 진행해 왔다.

1980년대는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이 되는 때며, 한국 기독교 선교 2세기를 열어가는 시기다. 이를 맞이해 한국교회는 각 교파별 기념사업은 물론 전국적으로 연합해 한국 기독교 백주년 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인천기독교연합회에서도 사업준비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이 때 괄목할 만한 사업은 백년 전, 미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의 첫 상륙지이며 처음 기도를 드린 인천항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오랜 시련과 각고 끝에 5년여 만에 인천시 중구 항동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선교 제2세기를 맞이하면서 국내를 넘어 세계 선교가 시작됐다. ‘88세계복음화대성회’를 준비하며 인천기독교연합회도 ‘88인천복음화대성회’를 거행할 만큼 성장했으며, 세계 선교를 지향할 만큼 인천의 교회들도 성장기를 넘어 성숙기에 들어갔다.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인천기독교연합회는 문화 선교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그동안 애써 뿌린 씨앗이 열매로 드러났으며 인천 교계의 협력으로 인천기독교회관까지 건립했다.

#청년의 열정 회복하길

인천이 가진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날 기독교 인구 비율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에 따르면 인천은 전체 295만 여명의 인구 중 95만명이 크리스천으로, 복음화율은 33.3%에 이르고 있다. 도시 인구 3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는 축복 받는 도시가 됐다. 인천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김흥규 목사(내리교회)는 “1883년 개항이 된 후 서양의 모든 문물과 문화가 인천을 통해 유통이 됐다. 또한 한국 선교의 출발이 인천이라는데 많은 인천지역의 목회자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선교 130주년을 맞는 올해가 더욱 특별한 것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첫 방문과 같이 4월 5일이 부활절이면서 동시에 주일이라는 점이다. 이를 기념해 기독교대한감리회(대표회장:전용재)는 한국 선교 13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한다. 4월 5일에는 한국 선교 역사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내리교회에서 외국의 감리교 지도자 천여 명이 모여 부활절기념감사예배를 성대하게 개최할 예정이다.

이에 내리교회는 올해의 표어를 ‘27살 청년 아펜젤러의 열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목회의 원년으로 삼자’로 결정했다. 아펜젤러가 27살의 나이로 한국을 방문한 것처럼, 청년의 열정과 순수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가 질타를 받고 잘못된 관행으로 몸살을 겪는 이 때 믿음의 근본인 성경과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쇄신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과감한 변화가 시급하다”며, “인천지역이 성시화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도시가 되도록 교회들이 심기일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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