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해묵은 분열을 극복해야 통일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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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해묵은 분열을 극복해야 통일도 가능하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5.02.2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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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분단 70년, ‘화해’가 먼저다-③역사 반복하면 한반도 평화는 요원
▲ 1945년 11월 김구 이승만 하지중장

열강에 의해 두동강 난 한반도

혹독했던 36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반도에 곧바로 자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강대국들에 의해 임의로 그어졌던 38선이 해방 70주년과 분단 70년을 같이 기억하게 하는 역사로 남을 지 해방 정국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당사자인 우리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강대국들이 남북한 신탁통치를 결정했고, 지금까지 총칼을 겨누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있을까 싶다.

한반도의 독립이 처음 논의된 것은 1943년 미국 루스벨트와 영국 처칠, 중국 장제스가 만났던 이집트 카이로회담에서였다. 카이로선언의 특별조항에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후 루즈벨트와 스탈린이 이란 테헤란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나 한반도의 40년 신탁통치를 협의하기도 했다는 흔적도 남아 있다. 그리고 1945년 7월 26일 포츠담회담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던 카이로선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은 8월 15일 전후 신탁통치를 논의하고 합의에 이르고 만다. 8월초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고 두 차례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이 예상보다 이르게 항복을 선언한 것이 그 배경이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한반도 주도권을 빼앗길 것으로 염려한 미국은 서둘러 신탁통치안을 소련의 스탈린과 합의해 38선은 확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 맥아더 사령관은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접수한다며 38선 경계를 선포했다.

해방 후 분열, 기독교계도 마찬가지

1945년 12월 미·소·영 외무장관이 모인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가뜩이나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치세력 간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 국론은 찬탁 반탁으로 크게 분열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당시 한국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 역사’에 따르면, “이 시기 기독교의 국가재건 운동은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 중심의 중도파(김구, 김규식 지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기독교민주동맹 중심의 좌파(김일성 지지), 그리고 이승만을 지지한 (기독교) 우파로 대별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백석대 조병하 교수는 “당시 김구는 ‘나라를 세우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동시에 하자’고 제안했고, 김규식은 ‘새로운 나라 건국의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그리스도 위에 나라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 역시 어머니 강반석 권사와 손정도 목사의 영향을 받았고, 북에서 부주석을 지낸 여운형 역시 승동교회 권사였다.

정치인들은 기독교적 국가 재건을 구상하는 데 크게는 뜻이 하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 스스로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들은 정적이었고 비극적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 신사참배 결의 당시 장로교 총회 임원들

신사참배 청산 못한 한국교회

한국교회의 해방 후 아쉬운 역사는 또 있다. 남한 사회의 친일청산 실패가 한국교회 안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남한은 친일세력을 척결하지 못하고 재등용하는 실수를 하고 만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도 신사참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본격적인 분열사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한국교회는 어느 종교보다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믿음의 선배들도 많았지만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역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 특히 장로교와 감리회는 신사참배를 교단에서 결의하기까지 했다.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는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됐고 1952년 결국 신사참배를 문제로 장로교에서 고신이 분열했다. 이후 신학적 노선을 문제로 1953년 예장과 기장이, WCC 가입문제를 두고 1959년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게 된다.

고신대 이상규 석좌교수는 “한국교회가 해방 후 친일 혹은 부일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한국교회의 혼란과 분열의 근본적 원인이었고, 또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가 친일 청산을 못한 것은 신앙정기의 상실, 교회분열, 반신앙적 교권주의, 권력지향적 신앙양태 등 광범위한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에서도 1948년 단독 정부가 수립됐고, 기독교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남한으로 내려왔고, 교회를 재건하는 데 열심을 냈다. 특히 재건 교회들은 서북청년단 등 반공주의 활동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한반도 평화, 세계교회 연대와 협력으로

분단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한반도의 허리가 두동강 난 데는 외세 열강의 영향이 가장 컸고, 신탁통치를 막거나 중단할 만한 민족적 합의를 끝내는 이뤄내지 못한 것이 중요 이유라 하겠다. 예장 통합 정용택 총회장은 “외세에 의한 분단이지만 우리도 하나로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회도, 기독교인들도 이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70년 전 생겨난 남남갈등의 여러 요인들은 지금껏 살아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분단 70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외교적으로 보면 한반도 평화문제에 주변국들이 밀접하게 관계된 만큼 대화의 물꼬를 열고 지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사회적 대승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연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평화를 향한 교회의 목소리는 각국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러시아정교회가 러시아를, 영국성공회가 영국 정부를, 미국교회들이 미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다.

이미 세계교회는 한국전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바도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락교회 故 한경직 목사가 7월 캐나다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있던 WCC에 긴급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현장에서는 경찰국가로서 UN군의 참전을 촉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이 결의문 영향으로 UN 안보리는 한국전 파병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1984년 일본 도잔소회의, 1986년 스위스 글리온회의 등 남북교회가 처음 만나도록 주선한 것도 해외 교회의 노력이었다.

더구나 2013년 WCC 제10차 부산총회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선언문’이 채택돼 전 세계 350개 회원교단이 다음 총회가 열리는 8년 동안 한반도 문제에 적극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회 날을 각국이 정해 지키기로 했으며, 오는 8월에는 평양에서 국제협의회가 개최되도록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협의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통일 위해 주도적인 한국교회 돼야

가장 근본적으로는 해방 전환기 한국교회가 보여주었던 분열을 이제는 끝내야 되지 않을까? 먼저 정치적 요소를 극복한 성경적 통일관을 만드는 노력이 한국교회에 요구되고 있다. 숭실대 김회권 교수는 “겨레의 화해와 통일사역에 참여하는 지름길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라며 “하나님과 화해를 맛본 우리가 분단 해소와 계급적, 세계적, 계층적 갈등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한국교회가 현재의 분열된 모습으로 통일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장 통일이 돼도 우왕좌왕하거나 북한 선교를 명목으로 소모적인 경쟁을 벌일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미래목회포럼 이윤재 목사, 한민족복지재단 전 회장 김형석 목사 등은 최근 통일에 앞서 한국교회가 무엇을 준비하고 협력할 지를 논의할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미 한국CCC(대학생선교회) 설립자 故 김준곤 목사는 성시화운동을 전개하며 남한과 북한 전역의 모든 동과 마을을 영친을 맺는 사역을 제안하고 추진한 바도 있다. 통일을 위한 준비를 위해 한국교회가 하나돼야 하지만, 당장 전망이 밝지는 않아 보인다. 북한의 주민들이 한국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예수님을 믿을까 심각하게 고민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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