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중앙권력의 쇠퇴는 신앙 권세들의 몰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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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중앙권력의 쇠퇴는 신앙 권세들의 몰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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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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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바벨론포로기의 경건, 신학, 교회의 삶
▲ 조병하 교수

교황 인노센트 3세(1198-1216) 때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던 교황권은 13세기후반 독일의 황제권에 대한 승리를 마지막으로 곧바로 프랑스왕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가장 먼저 프랑스에 민족국가라는 통치형태가 등장하면서 교황의 정치권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때 교황들은 나폴리의 안유스의 영향 아래 있었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1294-1303)는 사치한 생활을 했고 자신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것을 나타내려했다. 그는 프랑스왕 필립4세와 싸워 다시 교황의 세계지배권을 행사하려했으나 강력한 프랑스의 군주와 백성들의 민족의식에 의해 심각한 패배를 맛보았다. 유럽의 보편교회를 신정국가로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논쟁의 시초는 국가가 성직자들과 수도원들에 과세를 하는 일로부터 일어났다. 1296년 교황은 “클레리키스 라이코스(성직자들에게 평신도들은)”이라는 교서를 통하여 교회의 징세가 오직 교황의 권리에 속하고 이러한 권리를 훼손시키는 자들은 파문과 모든 직무상의 행위를 금지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관철시킬 수 없었고 반발에 부딪혔다. 1302년 교황은 교서 “우남 쌍탐(하나의 거룩한)”을 선포했다. 그는 교서에서 지금까지의 교황의 정치권력을 요약하고, 다시 한 번 가장 냉혹한 교황청수위주의자들의 명제인 ‘세상권세와 영적권세의 두 검에 대한 가르침’(눅 22:38)을 발표하고, 로마 감독에 대한 복종이 구원의 필수요소임을 강조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출교의 위협 때문에 우선 공의회에 참석하여 사과했으나, 1303년 교황을 포로로 잡아 대응하였다.


교황은 다음 수 십 년 동안을 치욕스럽게 프랑스에 예속됐다. 감금된 후 놓인 교황 보니파티우스는 수치감에 얼마지 않아 죽었고,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4)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 아뷔뇽으로 옮겼다. 그 곳에서 교황들은 “바벨론 포로”의 생활(1309-1376)을 보내야 했다. 이 시기는 교황정치가 혼절상태에 빠졌던 시기였고 도덕적인 타락의 시기였다. 또한 교황 요한네스 22세(1316-34)는 바이에른의 루드비히(1314-47)와 역사상 교황과 황제사이의 마지막 싸움을 싸웠다. 1356년 “금인칙서(금속으로 봉인된 문서)”는 교황의 허락이 없이도 황제를 선출할 수 있도록 했다.


교황청의 포로기 후 1378년부터 1415년 콘스탄쯔공의회까지 교황청은 로마와 아뷔뇽으로 분열됐다. 교황청에 대한 주된 비판은 교황의 재판권과 재정오용에 대한 것이었다.


교회의 중앙권력의 쇠퇴는 곧 이어 그 밖의 교회와 신앙의 권세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우선 대형의 수도원들의 타락이 있었다. 수도원들은 부와 쾌적한 삶에 탐닉하였고, 금욕적인 엄격성은 소원해졌다. 걸식 수도단들도 14세기에는 타락했다. “그리스도의 가난(청빈)”에 대해 ‘영적인 사람들’이 교황들과 정열적으로 벌였던 논쟁은 교황의 억압으로 끝이 났다. 가난에 대한 정책은 교황의 정치에서 오래도록 요동했다. 교황 요한네스 22세는 1317년 ‘영적인 사람들’에게 종교재판을 행했고, 1323년에는 프란키스쿠스파의 이론적인 토대인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공동의 소유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 “쿰 인테르 논눌로스(그 어떤 사람들 중에 ... 때에)”를 이단적 가르침이라고 공언했다.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시기 스콜라주의의 쇠퇴는 우선적으로 걸식 수도단에 의하여 양육되었던 교회의 학문의 쇠퇴를 가져왔다. 스코투스주의자들과 토마스주의자들 간에 끝없는 논쟁은 스콜라주의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길(방법)’은 이들의 붕괴의 시점에 시작했다. ‘새로운 길’의 시작자였던 파리대학의 교수요 둔스 스코투스의 제자였던 옥캄의 윌리엄은 ‘영적인 사람들’과 교황과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1328년는 바이에른의 루드비히에게로 도주하여 1347년 이 후에 뮌헨에서 죽었다. 신앙과 앎(학문)은 그에게 날카롭게 상호 파괴적이었다.


14세기 교회의 일반적인 몰락현상 가운데 빛을 비춘 것이 독일의 신비주의였다. 독일의 신비주의는 동방에서 생겨나 비잔틴제국에서 꽃피운 것이 프랑스로 옮겨와 성장했고, 독일에서 심화되고 신앙적으로 특별하게 성장했다. 독일어로 된 신비주의 문서들은 이미 13세기부터 소개됐다. 위대한 사색적인 소유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그의 제자들 요한네스 타울러, 하인리히 수소에 대한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었다. 신비주의의 확산과 신앙적 삶의 내면화에 대한 증대하는 갈망은 남부 독일의 “하나님의 친구들”에게서 나타났는데, 이들은 수도원들과 반속수도원여성단체회원들, 도시의 시민들과 수공업자들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에게 적극 호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신비주의에 접하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성지순례, 사면부, 성유물, 기적 등 당시 점점 확고해 지는 교회의 관습을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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