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주기철, 박윤선 목사 … 닮고 싶은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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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주기철, 박윤선 목사 … 닮고 싶은 신앙인”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5.01.09 1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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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협 발표회 ‘내가 닮고 싶은, 존경하는 사람’ … 7명의 신앙멘토 조명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3)

오늘날 많은 이들이 닮을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한국교회 일선 지도자들의 문제가 쉴 새 없이 거론되며 세속화와 본질을 잃은 신앙이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면, 과거 신앙의 모본으로서 살아간 수많은 선배들이 있었고, 이들의 삶은 지금까지도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자들이 이들의 순수한 신앙과 삶의 궤적을 밟아나가는 일이 과제로 남겨졌다. 9일 분당한신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대표회장:김명혁 목사) 월례발표회에서는 삶으로 작은 예수가 되어 좁은길을 걸어갔던 7명의 ‘신앙멘토’를 조명했다. 7명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나서 자신의 신앙 멘토를 설명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을 오롯이 닮아가기를 소망했다. 

▲ 한복협 월례발표회가 지난 9일 분당 한신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7명의 목회자와 신학자가 나서 자신의 신앙 멘토 7명에 대해 소개했다.

●‘일사각오’의 신앙인 - 주기철 목사

1938년 한국 예수장로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로 공식 가결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이가 있다. 일평생 일사각오의 신앙을 강조한 주기철 목사(1897~1944)는 ‘신앙에 충실한 것이 곧 애국’이라고 외치며,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했다. 1940년 산정현교회에서 전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가 그의 마지막 설교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 그를 검거했고, 산정현교회는 못 박아 동시에 폐쇄시켰다.

그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일본형사가 경찰서 마당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에 갇힌 성도들을 불러 모아 놓고 주기철 목사를 끌어냈다. 그 앞에는 무수한 못이 솟아있는 널판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는 일본형사가 신도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신사참배를 하겠다 하면 주목사가 못 위를 걷지 않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위를 걷게 할 것이다.” 그러나 주 목사는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십시오. 오직 주님의 계명을 굳게 지키십시오”하고는 자진해서 못판 위로 올라섰다. 그 순간 성도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찬송을 불렀다. 결국 주 목사는 감옥에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다음날 감옥에서 병사했다.

최이우 목사(종교교회)는 “주기철 목사의 신앙은 주님을 사랑하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간 것이 신사참배 반대로 나타났다. 그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 우리의 생명을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작은 예수, 사랑의 원자탄 - 손양원 목사

한국의 성자요, ‘작은 예수’로서 삶을 살아갔던 손양원 목사(1902~1950). 그는 일평생 여수 애양원의 나환자를 돌보며 진정한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았다.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기를 주저 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일상 속에서 실천했다.

손양원 목사는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6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월 17일 해방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두 아들마저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내 그는 하나님께 9가지 감사 기도를 드리며 이들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다. ʻ사랑의 원자탄ʼ이란 그의 별명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음은 그가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나환자 돌보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의 기도다. “사람들이 병으로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얼굴이 무섭게 변해 있으니 대하기가 힘듭니다. 무섭지 않게 하시옵소서. 환자들의 살이 썩으니 냄새가 심합니다. 냄새를 못 느끼게 하시옵소서. 처음 나병환자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했으니 이들을 위한 목회로 끝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철 목사(남서울교회 원로)는 “그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음을 생각할 때 정녕 우리가 본받기 어려운 선배가 아니라 우리고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모범”이라며 “그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참 목자상”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설교자 - 박윤선 목사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개혁주의 설교자이자 성경주해학자인 박윤선 목사(1905~1988). 그는 강한 영적 통찰력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66권의 신구약 성경주석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성경주석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표지가 되었으며 한국교회에 큰 유익을 남겼다.

또 그는 삶을 통해 ‘오직 말씀’과 ‘오직 기도’의 생활을 실천하며 한국교회의 모본이 되었다. 7개 국어에도 능통해 히브리어와 희랍어, 영어, 독일어, 화란어 등 성경을 해석하기에 알맞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을 주석하고 평생을 신학 교육에 매진했던 그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지만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며 고백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그간 자신의 사역을 회고하며 “나는 80년 묵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안만수 목사(화평교회 원로)는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힌 목사요 신학자”라며 “밖으로는 자유주의 신학, 안으로는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참된 개혁주의 신앙을 세우는 일에 평생 혼신을 다해 온 목사요 신학자”라고 밝혔다.

●세계 한국 선교사들의 대표 - 서만수 선교사

서만수 선교사(1939~2009)는 1970년 예장합동 제55회 총회에서 파송 받아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40여 년간 사역하며, 선교의 교두보를 구축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별세하던 날까지 384개의 현지교회를 개척 설립했고, 3000 촌락에 십자가 세울 비전을 품고 5년제 정규신학대학(STTIN)을 운영하며 사역자를 양성 파송해 왔다. 또 사역 초기부터 선교동역자로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해 아시아권의 기념비적인 한인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는 “이국땅에 사는 성도들의 사명이 바로 선교”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며 이민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고취시켜 모든 성도를 선교사가 되게 했다. 또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선교사들의 대표가 되어 진실과 정직함으로 섬겼다.

선교지에서 그의 사역을 지켜본 신동우 목사(산돌중앙교회)는 “가족보다 다른 식구들을 챙기고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주셨다. 생사를 가늠하는 현장을 수없이 만났지만 참고 또 참아내셨으며, 불의한 것을 외면치 않으시고 고쳐주시고 보듬어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중국 선교의 개척자 - 홍종만 선교사

“그가 세운 공적만큼 자신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적인 순종과 헌신의 삶으로 중국 선교의 개척자로 살았습니다.”

홍종만 선교사(1929~1982)는 거창고 교사로 재임하다가 주의 종으로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나이 마흔에 선교사로 헌신해 ‘한중선교회’를 조직하고 이끌며 중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본래 그는 일본 선교를 위해 1947년 합동 총회에서 일본 선교사 파송청원의 허락을 받았으나 비자 문제로 홍콩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후 그는 ‘홍콩한인연합교회 3대 담임’으로 헌신하고 목회하다가 중국 선교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1978년 현재의 한인세계선교사회(KWMF)의 전신인 한국 선교사 동지회가 조직될 때 최연장 선교사로서 초대 회장이 되어 선교사들이 연합해 활동하도록 하는 일에 힘썼다.

같은 거창고에 재직하며 홍 선교사의 삶을 지켜본 유관지 목사(감리회북한교회연구원 원장)는 “홍종만 선교사님은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재개기의 여명을 장식한 분”이라며 “이런 신앙인, 이런 성직자, 이런 현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 현대판 ‘현숙한 여인’ - 보넷 브라이트 여사

많은 사람들은 현대판 ‘현숙한 여인’이라고 그녀를 평가한다. CCC(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이며 20세기 최고의 전도자라고 불리는 빌라이트의 부인 보넷 브라이트(Vonette Bringt) 여사는 1951년 UCLA에서 CCC를 창설하는데 함께 했던 주요 멤버다. 그녀는 평생 남편의 복음화 운동의 동역자로 대학생 선교와 세계선교에 매진했는데, 그녀의 왕성한 활동은 오늘날 많은 여성 크리스천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기도운동에 열정을 쏟아 ‘National Prayer Committee’를 조직해 리더들과 함께 영적 부흥운동을 위한 기도운동을 벌였다. 또한 1988년에는 ‘National Day of Prayer’의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미국 의회로 하여금 만장일치로 매년 5월 첫 목요일을 ‘National Day of Prayer’로 제정하는 일을 성취했다.

김윤희 교수(한복협 여성위원장, 구약학박사, FWIA 대표)는 “그녀는 현대의 여성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도전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라며 “그런 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라고 평가했다.

이어 김 교수는 “제가 만난 분들 중 예수 그리스도를 잘 대변해주는 멋진 여성이자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라고 전했다.

●‘예수’로 산 사람 - 쟌느 귀용 여사

고난 속에서도 ‘오직 예수’로 살아간 이가 있다. 잔느 귀용(Jeanee Guyon, 1648~1717) 여사는 종교개혁 이후 무너져가던 가톨릭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최고의 영성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족의 딸이었던 귀용은 조산아로 태어나 평생 몸이 약했다. 16세 나이로 22세 연상인 귀족과 결혼한 첫 날부터 남편 병수발에 시어머니 학대까지 견뎌야 했고, 전염병으로 두 아들과 딸을 잃었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로는 재산까지 모두 빼앗긴다.

또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얻어지는 의롭다 함’과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그녀는 가톨릭 당국과 루이 14세에 의해 이교도라고 정죄당한 채, 8년 동안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 귀용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고, 주님을 만난 후 줄곧 그분의 임재 가운데서 살아간다. 출감 후에도 길을 잃은 자들에게 길을 찾는 법을 알려주며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을 지켜나갔던 잔느 귀용은 1717년 6월 9일,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70세의 나이로 본향에 돌아갔다.

이윤재 목사(분당한신교회)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잔느 귀용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씨름했던 영성적 주제는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이기도 하다”며 “그녀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을 배울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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