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요? 하나님 찌르라는 곳 찌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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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요? 하나님 찌르라는 곳 찌를 뿐”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4.12.17 0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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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술로 복음 전하는 태국 김항균 선교사
▲ 김항균 선교사가 침술 사역을 하고 있다.

침술과 함께 복음을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뤄진 태국 북부 빠이에서 사역중인 김항균 선교사. 김 선교사의 별명은 ‘명의’다. 도심에서 센터 겸 교회인 ‘빠이은혜교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산간지역으로 순회를 하며 몸이 아픈 이들에게 침을 놔주고 있다.

동양침술 뿐 아니라 약물이나 수술 없이 신경과 근골격계를 치료하는 방법인 카이로프랙틱 역시 그의 전문분야다. 사역을 시작한지 벌써 10년째. 워낙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데다 한 번에 2-300명 정도의 환자를 상대하다 보니 환자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기억하기는커녕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환자를 봤는지 헤아리기도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지역을 돌고 돌아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마을 주민들로부터 ‘당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말을 들으면 뿌듯한 마음과 함께 더 자주 찾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학부 때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카이로프랙틱이 선교지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죠. 침술 같은 경우에는 강원도에서 말을 타고 다니며 7개 교회를 개척한 유명한 목사님을 통해서 사사받았습니다. 외국에서 시술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련을 했죠. 태국 같은 경우에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베푸는 치료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 간절하게 치료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선교지에서 쓸 생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귀하게 쓰이게 될지는 예상 못했죠.”

침을 맞고 우는 사람, 그렇게 아프던 게 다 나았다는 사람,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기쁘다는 김 선교사. 자신을 의사로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로서 말씀과 함께 몸으로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웃어 보인다.

“지난해 팔에 문제가 있는 7살 아이가 엄마와 함께 저를 찾아 왔습니다. 왼쪽 팔에 마비가 온 아이었는데 침을 놔줬더니 깨끗이 나은 거예요. 이런 사례는 손에 꼽을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선교지에서 특별한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다들 저보고 명의라고 하는데 사실 저는 하나님이 찌르라는 곳에 찌를 뿐입니다.”

▲ 김항균 선교사와 가족

아픔마저 사용하시는 하나님
남들에게 명의라고 불리는 그이지만 정작 딸에게 닥친 병마 앞에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첫째 딸 하진이가 2살이던 7년 전, 김 선교사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서럽고 힘들었던 때였다고 회고한다.

“두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뎅기에 걸렸습니다. 뎅기는 특효약이 없고, 피가 마르는 병이라 계속 수액을 투여해서 피를 물게 만드는 것밖에 치료법이 없습니다. 가만 두면 병원에서는 죽을 거라고 하는데 입원시킬 돈이 없는 거예요. 당시 주치의가 ‘너는 선교사인데 왜 입원을 못하냐’고 하는거에요. 선교사라면 다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때는 제정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죠.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이 거두실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하면서도 딸에 대한 미안함과 제 자신의 무력함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그때 하나님은 딸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가난한 외국인 선교사 가정을 긍휼하게 생각했던 주치의가 진료비와 입원비를 크게 탕감해준 것이다. 이 일은 오히려 김 선교사에게 태국을 더 품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하진이가 건강해진 것은 물론이고 그 전까지 도움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현지인들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또 이 일이 있은 뒤 병원에서 한국어 통역이 필요할 때마다 그를 찾게 됐다. 현지인들과의 새로운 만남의 장이 열린 것이다. 김 선교사는 하나님은 아픔까지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며,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돌아보면 은혜였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선교사가 된 산골소년
김 선교사는 시골(충북 청원) 출신이다. 교회가 없는 산골 지역에 살다가 교회가 있는 마을로 이사 가면서 처음 주일학교 문화를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워낙 시골이라 목회자들이 반년을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며 ‘나라면 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목사가 되기로 서원했다. 선교사가 된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생각과 경험들이 선교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고 회상한다.

“외딴곳에서 살다가 처음 교회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죠. 주일학교라는 데를 처음 갔는데 참 좋았어요. 성경책도 선물로 주고, 여름성경학교도 하고... 그런데 도시에서 온 많은 목사님들이 길면 6개월을 채 버티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걸 보면서 어린마음에도 ‘이분들이 도시출신이라 시골에서 견디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라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부터 선교적인 마인드를 갖게 된 것 같아요. 농촌목회와 마찬가지로 현지 적응이 안 되면 선교도 불가능하거든요. 저는 시골 출신이라 어디다 떨어뜨려놔도 적응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선교지에서는 복음이 도시에서보다 더욱 간절한 선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철저한 현지인 위주의 사역을 표방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결국 현지에 남을 사람은 현지인 사역자라는 것. 직전 사역지인 치앙마이 센터 역시 현지인 사역자에게 이양했다. 선교사가 앞에 나서지 않고 옆이나 뒤에 서서 터치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여긴다. 건물이 필요해서 짓게 되더라도 현지인들이 직접 관여하도록 한다.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현지인 성도들의 힘으로 하게 해야만 선교사가 떠나서도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한국인들이 하는 선교는 보여주는 부분이 강합니다. 선교사는 주인이 아니고 세우는 사람임에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아요. 선교는 선교사와 현지인이 함께 하는 겁니다. 내 사역, 내 교회, 내 태국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합니다. 치앙마이 센터를 넘겨주고 오면서 저 역시 공허감을 느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음 단계로 빠이 은혜교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빠이에서의 사역 역시 현지 성도들의 필요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비전
김 선교사가 한번 순회사역을 하면 보통 400KM, 많게는 1200KM를 왕복한다. 현재는 차량이 노후해서 매번 랜트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 선교사의 방문을 요청하는 곳이 많은데 차가 없어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 많은 이들에게 침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하단다. 그가 개척한 빠이은혜교회는 현재 교회 부설 센터에서 여학생들의 기숙사를 운영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탁아소를 세워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 모두가 현지인 목회자 주도로 진행 중인 사역이다. 김 선교사는 이곳을 지나는 아이들이 ‘제2의 김항균’으로 자라나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게 되길 기도한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함이라’는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는 김항균 선교사. 그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은 어디든 두려움 없이 달려간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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