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했던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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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했던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4.12.0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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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기독교 유적지 답사 통해 본 하일레 슬라세 황제
▲ 1968년 한국을 방문한 하일레 슬라세 황제(오른쪽)가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해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다는 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정작 에티오피아는 공산화되어 왕정이 무너졌고, 참전용사들은 정권을 쥐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반역자’라는 낙인까지 찍혀 오늘날까지도 힘겹게 살고 있다는 건 잘 모를 것이다. 한국을 사랑했던 황제, ‘새마을 운동’을 좋아했던 황제, 하지만 무너진 왕정으로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로 남은 하일레 슬라세 황제를 소개한다.

▲ 아프리카인 최초로 미국 타임지 표지에 실린 슬라세 황제
1892년 리즈 타퍼리 마코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슬라세 황제는 어릴 적부터 총명했다. 뛰어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17세부터 일찍이 국정에 나섰다. 나라의 지방 소도시를 통치하면서 정치적인 안목을 보여줬던 슬라세는 진보주의파와 보수주의파 모두가 그를 합당한 후계자로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정치 수완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1930년 선제 자우디투 1세가 서거하자 그는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을 가진 하일레 슬라세로 이름을 바꿔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대관식 이후 미국 타임지 표지에도 실리기도 한 슬라세 황제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타임즈 표지에 실린 사람이기도 하다.

슬라세 황제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조들이 매번 실패한 노예제 폐지를 성공시켰고, 헌법을 제정했다. 당시 매우 진보적인 개혁으로 평가받았던 슬라세 황제는 에티오피아를 국제연맹 회원국으로 이끌었고, 근대화 운동을 펼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35년, 이탈리아의 파시즘 무솔리니가 국제연맹의 경고를 무시한 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슬라세 황제는 직접 에티오피아 군대를 이끌고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에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만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상황을 국제연맹에 호소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시 국제연맹은 현재의 UN이 아닌,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그저 말뿐인 평화기구였다.

그 후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영국군이 동아프리카 작전을 시작하자 마침내 에티오피아도 독립할 기회를 얻게 된다. 에티오피아 군종 최정예만을 선발한 정예부대와, 그들과 합류한 영국군으로 구성된 독립군 ‘기드온 특공대’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리고 1942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고 에티오피아는 독립하게 된다. 영국의 도움을 받아 슬라세는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복위됐다. 슬라세 황제는 외교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봉건주의적인 사회구조를 철폐하고 전국민에게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당시 국민소득 3천달러까지 이르러 아프리카에서 부유한 국가로 부상하기도 했다.

1950년, 지구 반대편 동북아시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슬라세 황제는 UN연합군에 참가해 자신의 황실 근위대인 메할 세파리를 파견한다. 종전 후 1968년, 슬라세 황제가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대한민국과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 공지천에 가면 슬라세 황제가 방한 당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며 기념비 앞에 심은 나무가 아직까지도 자라고 있다.

▲ 국립박물관 앞에 서 있던 슬라세 황제의 동상. 그 앞에는 청년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시간이 금이니 열심히 일하십시오’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 얼마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슬라세 황제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좋지 않았다. 슬라세 황제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의회를 탄압했고, 스스로 헌법까지 고친다. 특히 1970년대 찾아온 기근과 가뭄으로 전국민은 슬라세 황제를 등지게 된다. 위태하던 왕정은 결국 1974년 ‘더르그’(derg)라는 공산주의 집단에게 몰락당한다. 슬라세 황제는 체포되어 가택 감금되었고, 에티오피아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그리고 1991년, 공산 정권이 끝날때까지 대한민국과 에티오피아의 관계는 냉랭해진다. 한편으로는 북한과 수교를 맺으며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 슬라세 황제의 침실. 왼쪽 위 벽에 걸려있는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 성화가 그의 신앙의 깊이를 알게 해준다.

슬라세 황제는 감금 후 1년만인 1975년 가택에서 의문사하게 된다. 더그 정부는 전립선 수술 중 발병한 합병증 때문에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슬라세 황제는 사후 제대로 된 장례 절차 없이 그의 유해는 궁전에 묻히게 된다. 1992년에서야 그의 유해가 발굴되었고, 그가 죽은 지 25년이 된 200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황제다운 장례식을 치뤘다. 지금은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트리니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정치 혼란과 종교분쟁, 식량 부족, 경제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소득은 과거 3천달러의 10분의 1도 채 안되는 빈곤 국가로 전락했다. 다행히 최근들어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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