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앙인 된 ‘못해 신앙인’, ‘어꾼 쁘레야 예수’를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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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신앙인 된 ‘못해 신앙인’, ‘어꾼 쁘레야 예수’를 전하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11.1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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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귀국해서 고국의 가을을 만끽하고 있는 김영숙 권사

태국에서 밥 나눔 선교하는 김영숙 권사
모태 신앙으로 자랐지만 30대 중반까지는 ‘못해 신앙인’이었다는 김영숙 권사. 어디로 이사 가든지 교회는 쭉 다녔지만, 만사에 따지기 좋아하고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면 안 믿어”라는, 신앙인 듯 신앙 아닌 신앙 같은 신앙인으로 살아왔던 그녀. 지금은 충성스러운 권사가 되었고 남편은 장로가 되었다.

이뿐 아니다. 2년 전쯤엔 잘나가던 사업도 정리해버리고 훌쩍 태국으로 떠났다. 댕기열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사재를 털어 캄보디아 접경지대에서 ‘밥퍼’사역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함께 교회를 열정적으로 섬겼던 최재희 사모(홍익교회 김태복 원로목사의 아내)는 김 권사를 이렇게 부른다.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라고.

귀신 보이는 것도 뜻이 있어
“어려서부터 모태 신앙으로 자랐지만 내 속에는 차돌마냥 절대로 인정 않고 믿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면 못 믿었으니까요. 그래서 확률로 믿었죠. 천국과 지옥에 대해 ‘파스칼의 확률’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렇게 믿었어요. 정말 어거지로 믿은 거죠.”

그래도 누구처럼 교회를 끊거나 방학하진 않았다. 서울에 이사 오면서도 “서울에 가면 내개 딱 맞는 교회를 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믿음은 있었다. 가까이 홍익교회가 있었지만 처음엔 가기 싫었다. 심방 올 수 없도록 먼 데 있는 교회나 교인이 많은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아들이 목사님 아들과 친구가 되어 홍익교회를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코가 뀄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늘상 어디 옮길만한 다른 교회가 없을까, 두리번거렸던 그녀. ‘부창부수’라고, 남편 역시 목사님의 축도가 시작되면 교회를 빠져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영안을 열어버리신 거예요. 귀신들이 보여서 견딜 수가 없어요. 온갖 귀신들이 다 보였어요. 밤새 우울증에 시달린 거죠. 사실 저는 그런 걸 전혀 믿지 않았던 사람이거든요. 교회에서 누가 방언을 하면 일어나서 집에 와버렸던 사람이었어요. 저녁예배 때 큰소리로 기도하면 ‘저렇게 신명을 못 풀면 나이트클럽에 가지 교회에 왜 와’, 이렇게 짜증을 내던 사람이었거든요.”

귀신은 남편이 직장 야근으로 이틀에 한번 꼴로 집을 비울 때마다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도 오랜 믿음 생활에 들은 건 있어서, 그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는 말씀도 떠올랐다. 귀신이 보일 때마다 “피!”하고 외쳤다. 귀신이 꿈적도 안했다. ‘피, 하면 가야 하는데 왜 안가지? 아하, 예수님을 빼 먹었구나’.

“예수님의 피, 그렇게 외치니까 정말 귀신이 떠나가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하나님이 제게 주신 훈련이었죠. 모태신앙으로 자라 전혀 체험이 없고 냉랭한 믿음이었던 제가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 인생과 신앙의 멘토인 최재희 사모님과
교통사고 통해 주의 뜻 확신
신앙이 불붙으면서 교회생활도 열심을 더해갔다. 당시 교회를 담임했던 김태복 목사와 최재희 사모를 통해 그녀의 믿음은 더욱 깊어갔다. 그후 권사 임직을 받았고 남편 이석범 장로도 시무장로로 헌신하게 됐다. 지금도 김 권사는 “김태복 목사님같이 청렴하고 정직하게 목회하시는 분을 못 봤다”고 말한다. 최재희 사모를 향해서는 “사모님이 아니면 오늘날 제가 없었다”면서 “저의 멘토이고, 롤 모델”이라고 고마워한다.

“제가 태국으로 가게 된 것도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였어요. 어느 날 기도 중에 태국 선교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 전부터도 ‘하나님 앞에 이대로 살다 가면 부끄러울 것’이라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까 사업 때문에 안되더라고요. 계속 들어오는 주문을 끊고 떠날 수가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추운 저녁이었다. 평택 백화점 사거리 1차선에서 정지신호를 받고 서있던 이들 부부의 차를 음주운전자의 차량이 와서 받았다. 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치 컵을 끼우듯이 정확하게 차안으로 들어와 끼워졌다. 덕분에 차는 폐차가 되었지만 사람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날 정신이 바짝 났죠.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한다. 그런데 입원해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업이 정리되더라고요. 마음 또 변할까봐 인터넷으로 태국의 집을 구해서 이삿짐까지 미리 부쳐버렸어요.”
 

▲ 나눠주는 도시락에는 '어꾼 쁘레야 예수'를 함께 주는데, 지금 껏 버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요즘엔 '할렐루야, 아멘'으로 응답하기도 한다.


김 권사가 있는 곳은 캄보디아 접경지대와 가깝다. 이곳엔 짝퉁 물건이 유명해서 캄보디아 사람들이 매일 2만여명씩 넘어와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그날그날 일을 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굶어 허기에 시달리고 있다. 쓰레기통을 뒤지다 관광객이 버린 음식을 먹는 모습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매일 그렇게 점심을 굶는 캄보디아 사람들 120~150명에게 음식을 제공합니다. 가져가서 먹을 수 있도록 빵이나, 도시락을 만들어 주죠. 저희의 이런 일을 알고 약이나 그 밖의 물건들이 후원으로 들어오면 나눠주기도 하고요. 매일 이 일을 하고 돌아올 때면 불쌍해서, 이게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범벅이 돼서 돌아옵니다.”

기적의 약초 ‘모링가’에 담긴 꿈
밥 나눔을 할 때 캄보디아 말로 말씀카드를 붙여서 준다. ‘어꾼 쁘레야 예수’는 ‘예수님,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다. 놀라운 일이 있다. 캄보디아는 모든 쓰레기들을 길에 버려서 지저분하다. 아무 데나 버리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다. 그런데 그동안 길에 버려진 말씀카드가 없었다. 유심히 살펴봤는데, 딱 한번 어린 아이가 땅에 떨어뜨린 적을 빼고는, 한번도 못봤다. 요즘엔 ‘어꾼 쁘레야 예수’하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할렐루야’ ‘아멘’을 화답하기까지 한다.

▲ 캄보디아인 밥나눔사역중 현지인을 안아주고 있는 김 권사
국경 주변에는 못 입고 못 먹어 사람 꼴이 아닌 아이들이 많이 배회한다. 그들을 하루에 2~3명씩 데리고 대형마트를 간다. 이곳은 국경 너머 캄보디아 사람들의 로망이다. 한번이라도 와서 구경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속옷부터 겉옷까지 맘껏 사게 해준다. 그리고 KFC로 데리고 가서 제일 큰 닭다리를 손에 쥐어 주고 말한다. “이거 예수님이 주시는 거야.”

약도 없어 자칫하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댕기열 때문에 벌써 몇 차례 큰 고생을 했다. 때로는 ‘내가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하는 의문에 힘이 쭉 빠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은 그 모든 고통을 덮어버리고도 남은 은혜의 물결을 부어주신다.

“제가 전후 세대인데, 전쟁 후에 교회에서 선교사님들이 주시는 과자들을 얻어먹었던 시절이 있었잖습니까. 국가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았죠. 지금 저희의 밥 나눔 사역으로 밥을 얻어먹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지금은 잘 몰라도 언젠가 저희처럼 기억할 날이 올 겁니다. 그때 국경에 이런 사람들이 와서 왜 ‘어꾼 쁘레야 예수’를 했는지 아는 날이 올 겁니다. 그 생각을 하면 다시 힘이 나죠.”

김 권사와 이 장로 부부는 비전센터를 꿈꾸고 있다. 한류의 영향이 큰 이곳에서 비전센터를 세우고 한국 문화를 전하며 선교한다면 큰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처음 떠날 때 약속했던 2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녀는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 밥퍼 사역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곳에서 ‘기적의 나무’로 알려진 ‘모링가’라는 약재를 사업화해서 비전센터와 선교사역의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준비 중에 있다. 더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하얀 이를 시원스럽게 드러내며 ‘어꾼 쁘레야 예수’를 외치는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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