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빠진 사회, 부활신앙으로 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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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사회, 부활신앙으로 일으키자
  • 승인 2001.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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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생긴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증언함으로써 절망 속에 허덕이는 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사명을 갖는다. 김장환 목사(2001년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 대회장. 극동방송 사장)는 부활신앙은 ‘진리의 승리이며 절망의 거부’라면서 금년 부활절이 어려운 우리 사회에 용기의 근원이 되고 재기의 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국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교회가 교회다워지도록 노력하고, 한마음이 되어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 협력정신을 드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온누리에 퍼져 모든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기강으로 보나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이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지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고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언제 한번 진정한 평화가 깃들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기독교인의 경우,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서 일생을 보내야 했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부활이 주는 의미는 ‘부활신앙은 곧 절망의 거부’이며 ‘진리의 승리’라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를 들여다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제적인 고통에다 가정파탄까지 가져오는 아픔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는 사회대로 온갖 불법과 불의로 꽉차 국민들은 불안과 좌절 속에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등대여야 할 교회마저 공신력을 잃었다고 한탄합니다. 이러한 역사현장에 부활신앙은 용기의 근원이요 재기의 힘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땅에 떨어진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부패한 우리 사회도 소생할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은 부활의 이론에서 그 확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부활의 경험, 부활의 재연에서 부활신앙은 입증되고 우리의 삶속에 살아있는 ‘진리’로 터득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는 자는 재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절망에 빠진 모든 분들이 부활신앙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전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사회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안보와 국가관이 해이해져 가고 있어 걱정입니다. 이산가족상봉 문제도 지금 상태로는 얼마나 막막합니까. 하지만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차분하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시간)는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특히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고통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한국교회는 깨끗해져야 하고 목회자들은 소명에 순복하며 성도들은 죽도록 충성해야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이 바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은 어쩌면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한국교회의 교역자나 성도들이 정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 말은 곧 교회의 신뢰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신뢰를 회복해야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내용을 한번 살펴 보십시요. 온통 사기, 싸움, 시기, 협박 등의 내용으로 꽉차 있지 않습니까? 우리사회는 신뢰감과 정직이 상실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지경이 돼버렸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너무 성장 포만감에 사로잡혀 내실을 기하는 데는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1950년대의 유사종파가 발호할 수 있었던 것이나 1970년대 이후 대형화 추세의 밑바닥에는 성장에 들뜬 흥분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습니까? 해외선교현지에서는 왜 이렇게 연합이 잘 되지 않습니까? 연합과 협력정신의 결핍은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절 연합예배도 그렇지 않습니까? 각 지역별로 연합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부활절 연합예배가 언제 어디에서 드려진다는 광고조차 개교회에서 잘 안되고 있으니까요.
한국교회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협력정신부터 닦아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 부활을 믿는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조금 전에도 지적했듯이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적인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좋은 전도방법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천은 사랑이나 공의라는 기독교 가치관이 평가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역사를 해석하고 전망하는 신앙사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패턴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랑, 희생, 공의, 봉사가 생명력을 지닌 말이 되도록 기독교인들이 먼저 앞장서서 실천해야겠지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먼곳에서도 걸어서 교회에 열심히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통수단의 발달과 생활수준 향상으로 자동차가 생기고 예배도 5~6부로 나누어 드리다 보니 상당수의 신자들이 주일 아침 일찍 1부 예배를 드리고는 서둘러 놀러가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눈에 띕니다. 물론 저녁예배도 등한히 하는 경우가 많게 됐지요.

주일대예배와 저녁예배, 수요저녁예배 등 정기예배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텐데 그것마저도 점점 등한시 해지는 것 같아 걱정됩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1천명의 신자가 있는 교회라면 유년부는 1백명에 불과한 교회가 허다하다고 하니 10년 후, 혹은 3~40년 후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한국교회가 구라파교회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크리스천들의 생활양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건 개인이건 절제와 경건, 정직, 희생정신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은 사회적 책임도 다하여야 합니다. 일예로 장애인문제를 들어볼까요? 일반 초등학교와 장애인 통합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하니까 그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통합교육을 실시해 보니까 일반 아이들이 장애아동들과 예상 외로 잘 융화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편견,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얘기지요.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편견을 없애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수백 억을 들여 건축하는 교회가 있다면 기독교 초등학교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곳에서 장애아동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배려할줄 아는 마음을 키워주었으면 합니다.

- 금년 부활절 연합예배의 의미와 특징,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한민족(남북한)과 세계교회에 보내고 싶으신 메시지와 기도가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금년은 2001년이니까 2001명의 찬양대원을 세우자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요. 21세기의 사실상 첫 해로서 갖는 의미도 매우 크다고 생각되고요.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비NCC 교단이 연합하여 행사를 가지려니까 어려운 점이 많아요. 인류의 죄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라는 점에서 보면 교회든 단체든 모두가 적극적인 협력정신 속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협력과 연합의 모습이 보여질 때 한국교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사회에 인식될 것입니다.

차제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21세기에는 종교분쟁이 심화되면서 소수민족이 독립을 원하고 인종차별도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러한 혼란의 중심에 언제나 기독교가 있을 것이며 탄압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북아일랜드나 인도네시아 등을 보세요. 회교와 기독교가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 같아요. 인도는 힌두교와 기독교가, 남미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 21세기에 더욱 확산될텐데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관심갖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데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컴패션 총재와 만났습니다. ‘컴패션’이라는 단체는 현재 전세계의 36만명의 불쌍한 아동들을 돕고 있다고 합니다. 헤이티에 3만 명, 이디오피아에 3만명 등 가난한 나라 어린이 한 명당 28불씩 돕는다고 합니다. 저는 컴패션총재를 만나 북한의 어린이 1만명만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에 컴패션 총재와 재정담당 책임자가 합창단과 함께 북한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북한 어린이 1만 명만 도와준다면 북한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리라 생각합니다. ‘컴패션’은 교회를 통해서만 일을 한다고 하기에 저는 컴패션 총재 일행에게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이야 말로 남북분단의 벽을 허무는데 도움이 될테니 정책을 바꾸길 바란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만큼 성장했으니 세계를 품고 지원하는데 눈을 돌려야 합니다. 개인의 내적 부흥과 가정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물질만능주의와 팽창주의에서 벗어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됐을 때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고 사회를 이끌었던 것처럼 교회문화가 일반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문화사역을 적극 지원하며 인재를 키우는 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문인 선교로 대변될 21세기에 각 분야에서 전문인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고 그 영향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사회와 세계가 변화되리라 생각합니다.

부활절을 맞아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사랑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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