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0명을 한 마리 잃은 양 찾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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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명을 한 마리 잃은 양 찾는 심정으로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10.08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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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장기실종자추적팀장 이건수 경위
길을 가다 보면 사람 찾는다는 현수막을 종종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 앞을 지나친다. 그러나 그 현수막을 내건 가족의 마음은 애절하다. ‘살아생전에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텐데.’ 별별 가슴 아픈 사연으로 갈라진 사람을 찾아주는 경찰청 장기실종자추적팀장 이건수 경위.

벌써 1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그는 그 동안 고아, 미아, 입양자, 실종자 등 무려 4200명을 찾아줬다. 지난해에는 미국 월드레코드 아카데미로부터 이산가족 상봉 세계 최고 신기록 인증서까지 받았다. 모범공무원상, 청룡봉사상 등도 수상했다.

▲ 지금까지 4200명의 실종자를 찾아 세계신기록 인증서까지 받은 이건수 경위. 이런 놀라운 결과를 얻기까지 양치질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면서 많은 자기희생을 감수해왔다. 그러나 이 일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에 오늘도 밤 12시가 넘도록 실종자 찾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그 동안 쌓아온 전문성을 인정받아 올해 7월 생긴 장기실종자추적팀의 팀장을 맡게 됐다. 흥미롭게도, 이 팀이 일하는 사무실은 오래 전에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던 자리. 무고한 이들의 눈물을 많이 뺏던 이곳에서 이제는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오늘도 한 사람의 실종자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무실에서 아주 어렵게 짬을 낸 이건수 경위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은단부터 권했다.

은단을 꼭 챙겨 다니는 이유
“죄송합니다. 제가 밥 먹고 양치할 시간도 없어서요. 이게 제 양치입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밥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고1, 중3, 중2짜리 자녀들이 있는데 늘 미안하죠. 아빠가 아빠 구실을 못하고 사니까요.”

13년 동안 4,200명이면 거의 하루에 한 명 꼴로 찾아줬다는 말인데 이게 책상 앞에서 컴퓨터 몇 번 두드리고 전화 몇 통 때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이름을 찾아 지금까지 보낸 편지만도 8만 통이 넘는다.

흔한 이름일 때는 한 사람 찾으려고 1,000통 쓰는 일은 기본이다. 유전자 대조, 지문 검색, CCTV 조사도 뒤따른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건 현장 조사다. 결국 남들이 퇴근하는 저녁에도 전국으로 사람을 찾아 나선다. 책임자의 역할까지 맡은 요즘은 보통 밤 12시가 넘어서야 퇴근이다.

“몇 달 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사는 진영숙씨의 가족을 51년 만에 찾아드렸는데요, 그때 진영숙씨는 자기 성을 김 씨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김 씨로 결과가 나오지 않자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성 씨 40개를 대입해서 찾았어요. 총 2,700가정을 조사한 거예요. 그러다가 진 씨라는 걸 알게 됐죠.”

그 한 사람의 한 맺힌 사연을 풀어주기 위해 그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희한한 일을 다 겪었다. 언젠가는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는 날 새벽 4시에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까지 가서 가족을 상봉시켰다. 밤을 꼬박 새우고 돌아오는 길에 딱지를 두 개나 뗐다. 벌금도 자신의 돈으로 처리했다. 사실은 그것도 감사했다. 워낙 위험한 밤길이어서, 사고 나지 않고 무사히 귀환한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였으니까.

“한번은 실종자를 찾는데 그 사람이 쓸데없이 이런데 온다고 쓰레기통 뚜껑을 집어던지는 거예요. 그 황토색 뚜껑이 스핀을 먹고 날라 와 제 발을 스쳤는데 옷이 찢어지고 멍이 들고 피가 나더라고요. 형사 처벌까지 생각했다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넘어간 적도 있고요.”

사명은 목숨보다 귀하기 때문에
이름을 확인하려고 남의 집 우편물을 뒤지다가 도둑으로 오해받고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일은 다반사다. 이런 고충 속에서 밤늦도록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한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왜 1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사명이죠. 정말 인간적인 마음으로 했으면 벌써 그만 뒀습니다. 일하다 보면 정말 힘든 민원인도 만나게 되고 짜증날 때가 왜 없겠어요. 저라고 집에 일찍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러나 제 마음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을 항상 닮아가고 싶어 하니까 이 일을 사명으로 알고 하는 겁니다.”

너무 힘들어서 2004년 다른 부서로 옮기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옮기려고 하니 도저히 마음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5, 6살 때에 가족과 헤어져 고아원 같은 낯선 건물, 낯선 아이들을 만났을 때의 충격. 그 상처를 안고 평생소원인 부모님을 찾겠다고 찾아온 이들의 그 애잔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슬픈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겁니다. 또 그분들이 상봉해서 기뻐 눈물을 흘릴 때에는 저도 같이 울었고요. 그러다 보니 도저히 더 편한 데로 옮길 수가 없더라고요. 아하, 이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구나, 깨달았습니다.”

기독교 계통이 아닌 일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여러 차례 ‘신앙적 사명’임을 강조한 이 경위도, 힘들 때가 있다. 그건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마음고생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열심히 하면 ‘왜 저렇게 열심히 하지? 유명해지려고 저러나?’ 이런 불순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경위는 이것이 못 견디게 힘들다.

“경찰관의 사명도 있었지만 그 전에 예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일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는 그의 소명의식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 동안 ‘사람 찾기의 명수’로 소문난 그에게 그 노하우를 묻지만, 그 노하우 역시 다른 게 아니다. 사명이다. 사명으로 생각하면 시간, 방법, 노력, 열정 등 모든 것을 다 투입하게 된다. “사명이 목숨보다 귀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 다운 모습이다.

못 찾은 10%가 늘 맘에 걸려
“교회는 대학교 2학년 때에 처음 나갔습니다. 그때 미팅을 했는데 그분이 크리스천이었어요. 미팅 나와서 예수님을 전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불교 집안이었고 기독교에 대해선 전혀 몰랐습니다. 미팅했던 여자 분과는 어떻게 됐냐고요? 그때 금방 헤어졌어요. 이거 우리 아내가 알면 혼납니다(웃음). 예수님만 저에게 전하기 위해 만난 셈이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건 군대에서 제대한 후였다. 경남대 법대를 졸업한 후에 서울로 왔지만 가난한 지방 출신인 그로서는 서울에서 살아가는 자체가 역경이었다. 고시원 총무를 하면서 낮에는 총무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힘든 만큼 은혜도 더욱 깊어져갔다. ‘주님은 살아계신다, 주님은 나의 구주시다’, 이런 확신이 더욱 뿌리 깊이 내려갔다. 마침내 열매가 맺어졌다.

“구원의 확신 가운데 경찰관과 백골단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둘 다 합격한 거예요. 특별히 시험을 많이 준비한 것도 없었는데요. 아마 그런 믿음으로 복을 받은 것 같아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입은 거죠. 아내는 지금 백석대를 졸업하고 영안교회에서 강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늘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삽니다.”

우리나라는 열 집에 한 집 꼴로 실종자가 있다고 한다. 작은 땅 덩어리에서 이산가족은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편이다. 50년대는 전쟁고아, 이산가족으로, 60~70년대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헤어진 가족들이 많다. 해외입양도 세계1위를 기록한 나라다. 이 경위의 ‘사명’이 더욱 귀하여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른 분들이 ‘이건수 씨는 천사냐’고 하면 저는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민원인들에게 더 친절해야 하고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줘야 하는데 제가 그분들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찾은 분보다는 못 찾은 분들에게 늘 죄송하고 미안하고, 죄인이죠.”

대부분은 의뢰자의 90%를 찾아주지만 나머지 10%가 문제다. 찾아낸 실종자들이 훨씬 숫자적으로 많지만 그러나 그는 찾은 기쁨보다도 못 찾은 송구함을 늘 떨쳐버릴 수 없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의 얼굴에서, 길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타게 헤매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였다.
 

▲ 실종자를 찾기 위해 많은 이들이 수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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