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은 안식의 정신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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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안식의 정신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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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9.1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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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 연구위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학술부원장

한국의 교회는 안식일은 주일로 바꾸어 지키지만, 다른 절기들에 대해서는 무심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정당하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절기들이 안식일의 패턴을 따르는 한, 안식일이 살아 있으면, 절기도 살아 있다. 절기들을 신약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안식일도 신약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날짜를 지키는 것이거나 하루를 특별한 날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참된 쉼이 하나님을 닮아감임을 기억하는 것이며, 내가 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몸과 마음의 진정한 쉼을 누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안식일은 단지 안식일 하루를 가리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23장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절기들은 안식일에 근거하여 규정되었으며, 안식일의 확장이 안식년이었고, 가장 큰 안식년이 바로 희년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킬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26:2은 단지 안식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그 근본에 두고 있는 모든 절기들과 안식년, 희년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에 자유와 해방,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있고,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절기들과 안식년, 희년의 근본정신이다.
구약 본문에서 희년이 언급되느냐 아니냐로 희년이 구약에서 지켜졌다 아니다 말하기 어렵다. 바른 희년 준수는 바른 안식일 준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느헤미야 공동체에서 안식년의 준수를 말하지만(느 10:31) 희년 준수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희년 준수를 선언하기에 오십 년 후의 희년 준수 선언이 무의미하기 때문일 수 있으며, 안식년 준수 선언이야 말로 실질적으로 희년 준수 선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 10:31은 안식일 준수와 안식년 준수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거듭, 희년은 안식일의 바른 준수와 연관되어 있다. 이를 생각하면 예수께서 그 사역 내내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의 바른 준수 문제로 갈등하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안식일을 바르게 지킨다고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셨다.
안식일은 해방과 자유, 생명의 날이다. 갇힌 자를 놓여나게 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날이 안식일임을 확실히 보여주셨다.
구약의 말씀은 안식일의 핵심은 쉼에 두고 있다. 날 자체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쉼이 결정적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도 일로부터 쉬셨다. 이윤 추구와는 상관없이 그저 쉬셨다. 쉼을 격상시키고 거룩한 것으로 만드신 것이다. 잘 쉬기만 해도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다. 노동과 쉼은 서로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거룩하다. 그 무엇에 종속되지 않는다.
쉼은 노동을 위해 힘을 보충하는 시간이지 않다는 것이다. 종도 쉬고 집 안에 거하는 나그네도 쉰다. 출애굽기나 신명기가 초점이 다르지만 쉬게 하는 대상에는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안식년에 절로 난 소출을 먹게 되는 이들 가운데에도 종과 가축, 나그네가 포함되어 있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 명령의 의미는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분주한 노동으로부터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종과 나그네를 쉬게 하고 스스로도 수많은 일들로부터 쉼을 얻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거룩이라는 점을,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말고 너무 일에 쫓기지 말고 확실히 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창조 질서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안식의 근본은 쉼, 자유케 함에 있다. 물질적인 생산력에 의지하지 말고 충분한 쉼을 누리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피로 사회를 맞서는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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