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의 선(線)은 ‘선(善)’이어라
상태바
박수근의 선(線)은 ‘선(善)’이어라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4.08.26 2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목화 기자가 만난 하나님의 예술가, '박수근'

▲ 박수근, ‘빨래터’, 50.5×111.5cm, Oil on canvas, 1954.
새로 보는 크리스천 예술가 ‘박수근 화백’ 탄생 1백주년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 말은 故 박수근 화백의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이다. 그는 그림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실천했다. 우물물을 긷고 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하는 소박한 생활과 더불어.

내가 열세 살 적 추운 겨울에 처음 만난 화백 박수근 선생님은 ‘빨래터’에서였다. ‘빨래터’ 앞에 섰을 때 남다른 감동이 밀려왔던 건 그가 이미 인정받은 한국 근현대 화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박수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림에 가득한 그의 인정과 선(善)함은 어린 나에게 참 벅차게 다가왔다.

▲ 말년의 박수근 화백
십 여 년이 흐르고, 올해 박수근 화백 백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여러 미술 단체에서 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남들 아는 만큼에서 조금 더 안다고 생각했던 화백 박수근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23일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2014 아트미션 포럼’을 통해 그를 새로 보게 됐다.

이전까지는 박수근 선생님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유명한 수많은 작품을 살펴봐도 성경적이거나 신앙적 색채가 묻어나 있지 않다. 이번 포럼을 기회로 그의 삶을 엿보던 중 그림에서 우러나오는 감동 이상의 울림이 내 안에 퍼졌다. 수더분한 이름답게, 인간 ‘박수근’은 참 화가로, 참 신앙인으로 살았다.

박수근 선생님의 예술 전개과정을 보면 그의 체질적 서민성, 기독교 가르침에 따른 종교성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물론 그의 그림에 교회나 십자가(스케치 한 장 정도는 있다고 한다), 예수님, 사도들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깊은 평화와 따뜻한 정적이 있고 주어진 삶에 자족하는 서민상이 있다. 세상에서 주어진 일에 대한 소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인간의 모습을 그는 가장 아름답게 보았다.

톱밥 위에 그린 듯한 그의 그림을 서울 종로 사간동 현대갤러리에서 처음 만난 열세 살, 내가 느낀 기분도 그런 것이었을까. 박수근 선생님도 열두 살 되던 해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 후로 늘 “하나님,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며 기도했단다. 그리고 철저하게 그림에 전념했다. 찢어지게 가난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서든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그였다. 열세 살 그날, 나도 박수근 선생님의 그림을 모작하려 당시 집 근처에 있었던 목재소에 톱밥을 구하러 가기도 했다. 비록 모작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서양 화가 밀레는 평생 신앙심을 표현한 작가였다. 성경 말씀을 노동의 가치에 비유하며 평생 그림으로 믿음을 실천했던 최초의 화가였다. 인상주의 화가 고흐도 밀레의 그림을 모작할 만큼 밀레는 많은 화가들에게 신앙적 모티브를 주었다. 밀레나 고흐의 작품 속에 나타난 농부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주님이라 할 수 있는 것처럼, 박수근 선생님의 수많은 작품 속에도 낮은 자를 섬겼던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아트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겸재정선미술관 이석우 관장(경희대 명예교수)은 “박수근 그림에 나타나는 선은 단순한 선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과 정이 숨쉬는 선이며, 선만으로도 인간의 깊은 정감과 내면세계를 여지없이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기 업은 소녀’의 표정이나 ‘노인과 소녀’의 다리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수근 선생님만의 빈틈없이 잘 짜인 구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사용된 색채 등은 수없는 시도와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경지다.

이석우 관장은 “그의 그림은 아마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가난을 아름답게 보고 이웃과 이웃 간의 인간관계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 보고, 이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한 삶을 소망의 마음으로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은 깊은 신앙적 기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닐까”라며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운명 앞에 좌절하는 패배적 서민이 아니라, 오히려 굳건한 힘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난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관장은 “박수근의 그림에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감사의 자세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마태 5:3~10)는 가장 역설적인 진리의 외침이 캔버스 밑바닥에 짙게 흐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설의 화백들처럼 박수근 선생님도 그림에 대해 원숙한 경지에 이를 즈음 일찍 타계했다. 그는 절망적인 건강 악화 속에서도 붓을 들어 하나의 작품이라도 더 완성해보려고 몸부림쳤다. 쉰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화혼(畵魂)이 너무도 뜨거웠다. 수년이 지났어도 그 뜨거움은 그를 회자하는 글들을 통해 나에게까지 느껴지는데, 당사자인 박수근 선생님은 얼마나 더 하셨을까. 깊이 알고보니,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무엇보다 가장 서민적인 화가였기에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몇 해 전 미술 작품 경매계에서 늘 최고가를 선점하던 박수근 선생님의 작품을 생존하는 해외 팝아티스트가 앞섰다는 뉴스를 들었다. 작가를 막론하고 예술의 가치를 따질 수 있겠냐만은, 우리나라 근현대에 박수근 선생님의 깊음을 따라올 자가 국내외로 과연 몇이나 꼽을 수 있을까. 간만에 미술학도로 돌아간 기분에 뭔가 마음이 찡하다.

▲ 창신동집 마루에서 가족과 함께. 맨 오른쪽이 박수근. 1959년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